『고구려 사람에 대한 선망은 지금도 몽골사람들의 가슴 속에 진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를 보면 한 핏줄이란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의 손보기회장은 지난달 23일 제3차 한·몽공동학술조사를 위해 조사팀과 함께 몽골로 떠났다. 아직도 패기가 넘치는 노교수는 『고구려 성터 등 대초원에 한없이 깔려 있는 우리 조상의 유적을 발굴해 기필코 잃어버린 한국고대사를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몽골과학아카데미와 함께 벌이는 10년 예정의 이 대발굴 역사는 두 겨레의 혈연과 문화의 친연성 또는 동원성을 밝히려는 감상적 작업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몽골 땅에 우리 고구려 유적이 있었다」고 민족의식을 부추기고 즐기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노교수를 몽골로 떠나게 한 것은 역사 속에 살아 있으면서도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되찾고, 그로 해서 두 나라가 지니고 있는 깊은 유대를 확인하려는 역사학자의 사명의식이었을 것이다.
이 조사팀은 이미 92, 93년 두차례에 걸쳐 기초조사를 완료했다. 고려사람이 종이를 만들었다는 공장유적을 찾아냈고, 고구려 성터로 전해지는 유적도 답사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제국이 멸망한 후 소원해진 두 나라의 긴밀했던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1·5배에 이르는 동몽골의 대초원, 우리 조상이 말타고 달렸을 3천의 가이없는 거리를 답파할 때의 감회는 참으로 대단했다고 한다. 『여기에 고려(고구려)의 성터가 있었다는 겁니다』라는 주민의 증언을 들었을 때의 흥분과 감격은 짐작할만 하다.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 뿐 아니고 몽골 지역까지 뻗어 있었다는 최초의 확인을 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 역사책은 고쳐 써져야 한다.
한국일보사와 대륙연구소는 이 뜻깊은 사업을 2001년까지 계속한다. 이를 구태여 밝히는 것은 고구려와 이 조사의 의미를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상한 지역감정에 얽매이기도 했고, 그것은 역사 속의 나라까지도 분할시키곤 했다.
즉 신라는 경상도에서, 백제는 충청도와 호남에서 자기 것인양 했고 고구려는 북한 몫으로 팽개쳐 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해야 했다. 북한은 우리 역사상 유일한 자주국가로 고구려만을 꼽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한 것이 아니며, 또한 신라와 백제도 남북한 전체에 공통되는 역사이다.
중국사에서 고구려는 만주에서 흥기한 최초의 강력한 인접국가였다. 워낙 강대해서 항상 두려웠고 언젠가는 한번 쳐서 거꾸러뜨려야 안심이 되는 적이었다. 그처럼 강대했던 고구려라는 우리 역사가 동몽골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문화1부장>문화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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