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136일 고난의여정 값진기록으로…(금남선생「표해록」을 따라서: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136일 고난의여정 값진기록으로…(금남선생「표해록」을 따라서:하)

입력
1994.07.07 00:00
0 0

◎명나라 조정 “선비자세 감동”상내리기도/당시의 북경 옥하관 지금은 법원공사 “한창” 금남 최부와 그 일행은 도저소와 소흥부 등에서 철저한 신문을 받는다. 조선을 비롯한 주변 국가의 사신이 중국을 방문할 때조차도 명나라에서 정해 놓은 공노 이외의 길로는 통행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제한이 두어졌던 점에 비춰 중국측이 금남에 대해 가졌던 의심은 당연했다.

 웬만한 중국 관리들로서는 따라가지 못할 금남의 해박한 한문지식과 의연한 선비의 자세는 중국측의 의심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금남은 명나라 조정이 파견한 관리의 호위 아래 항주부터 대운하의 뱃길로 북경으로 향했다. 대운하는 가흥, 소주, 양자강, 양주, 서주, 제령, 덕주, 정해, 천진 등 주요 지점을 잇는 장장 2천의 교통로다. 금남은 운하의 북쪽 종점인 통주(현재 통현)에서 배를 버리고 노새를 타고 자금성 동남쪽에 위치한 숭문문에 도착한다.

 숭문문을 지나 외국사신의 숙소인 옥하관에 여장을 풀고 여기서 한 달간 머무른다. 옥하관은 원나라 때 통주와 자금성을 배로 오가기 위해 파놓은 물길인 옥하 근처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은 1970년대 초반까지 러시아 대사관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최고인민법원청사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옥하관에서 동쪽으로 20쯤 떨어져 흐르던 옥하도 복개돼 도로와 시민들의 산책로인 정의노로 변했다. 해마다 폭이 좁아진 옥하에 배가 다니지 못하자 1949년에 흙으로 메운 것이다.

 표해록 여행단은 금남이 머무르던 옥하관에서부터 그가 다시 조사를 받기 위해 방문했던 병부와 예부자리를 찾았다.

 금남이 병부를 방문하면서 보았던 천안문 근처의 「옥하교」는 「어하교」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갈진가교수는 『중국어로 「옥」과 「어」는 뜻과 발음이 똑같고, 가리키는 위치도 거의 비슷하여 동일지역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금남은 중국에 상륙한지 90여일 만에, 북경에 머무른지 보름 만에 효종으로부터 상을 받게 된다. 3천 이상의 대장정 동안 42명의 일행을 무사히 이끌고 도착할 수 있었던 지도력, 중국역사·지리 등에 관한 해박한 지식,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도 잊지 않는 지극한 효심과 애국심을 명나라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한 것이다.

 17대 후손인 최기홍옹은 『생사가 오고 가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초인적인 지혜를 발휘하여 42명의 목숨을 보존케 하고 학대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예의바른 언행과 꿋꿋한 자세가 중국관리들을 감동시킨 것 같다』며 선조를 회고했다.

 흰 모시옷 한벌, 베로 만든 덧옷, 가죽신, 버선 등을 상으로 받은 금남은 이튿날 단문을 거쳐 자금성 정문인 오문에서 황제를 알현한 후, 다시 승천문(천안문)과 장안좌문을 통해 옥화관으로 돌아가 귀국준비를 서두른다.

 4월 24일 북경을 출발한 그는 명 조정이 파견한 관원의 호송하에 말을 타고 산해관, 광령, 요양 등을 거쳐 6월 4일 꿈에 그리던 압록강을 건넜다.

 제주도를 떠난지 정확히 1백36일만인 6월 14일 서울 청파역에 도착한 금남은 성종의 명을 받들어 8일동안 「표해녹」을 작성해 올린다. 이후 금남은 홍문관 교리, 예문관 응교 등 승진을 거듭했는데, 이를 시기한 훈구파들이 상주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함하는 바람에 1504년 연산군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북경=최진환기자】

◎금남선생 17세 방손 최기홍옹/“사상·행적 연구 「학회」결성 계획”

 『금남선생의 체취가 밴 현장을 답사하는 동안 강행군에도 피곤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젠 차분한 마음으로 문중이 중심이 돼 주요 지점에 기념비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금남선생의 사상과 행적을 연구할 금남학회를 결성할 계획입니다』

 7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표해록 여행단을 이끈 금남의 17세 방손 최기홍옹은 표해록 연구와 기념사업에 새로운 의욕을 보였다.

 평생의 소원을 풀어 마음이 홀가분하다는 최옹은 『선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처음에는 당신이 겪었던 고생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팠지만 점차 중국인들로부터 조선의 선비로 존경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어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금남선생은 철저한 신문과 감시 아래서도 조선인의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고 국가기밀은 끝까지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중국인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시대가 바뀌어도 애국심의 본보기로 남을 것입니다. 외교관들에게도 좋은 교훈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최옹은 72년 농협에서 공직생활을 끝내고 89년에 「금남선생 표해록」을 직접 국역·출간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