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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이야기/임철순(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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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이야기/임철순(메아리)

입력
1994.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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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폭우피해를 입히는가 하면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는 찌는듯한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겨우 7일이 소서인데도 벌써 이러니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길 것 같다. 습도가 높은 것도 짜증스러운데 여성의 진한 화장품과 남성의 강력한 스킨로션 냄새까지 코를 괴롭힌다. 이런 여름 날 「주홍색 소반에다 짙푸른 수박을 올려 놓고 손수 쾌도를 빼어 쓱쓱 자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 중국 청조 때의 자유분방했던 문예평론가 김성탄의 불역쾌재문에 나오는 말이다. 장마철에 열흘이나 한 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따분함을 달래려고 즐거웠던 일을 한 가지씩 친구와 주고 받은 이야기에는 제목 그대로 통쾌하고 시원한 내용이 많다.

 「달포가 되는 장마에 취한듯 병든듯 날이 밝아도 일어나지 못할 만큼 나른한데 갑자기 뭇새가 날아 들었다. 지저귀는 소리에 얼른 휘장을 젖히고 창을 여니 눈부신 햇살과 씻은듯 해맑은 수풀이 눈에 차거늘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니랴」. 그리고 큰 붓을 들어 대서를 휘갈기는 사람, 병에서 물 쏟아지듯 글을 읽어 나가는 제자, 앞·뒤뜰이 풍로처럼 달아오르고 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는 폭염에 땀은 계곡물처럼 흘러 밥상 앞에 앉아서도 먹을 엄두를 못 내는데 갑자기 시커먼 수레바퀴가 떼지어 굴러오는듯 수백만 개의 금고가 울리는듯 내리 퍼붓는 소나기. 더욱 후련하고 시원한 것은 다음 문장이다. 「여름날 맨머리 맨발에 양산으로 해를 가리고 있는데 장정 하나가 노래를 부르며 물방아를 찧고 있다. 방앗살에서 솟아오르는 물줄기가 하도 줄기차서 은을 뒤집어 쓰는듯 눈(설)을 굴리는듯 시원하거늘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니랴」.

 림어당의 영역으로 서양에도 잘 알려진 불역쾌재문은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과 대칭을 이루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라고나 할까. 청빈과 무욕의 멋이 우러나는 동양의 명문이다. 생활의 즐거움을 일깨워주는 글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글 속의 즐거움일 뿐 이제 우리 주위에서 시원한 이야기를 찾아내야 할텐데…. 월드컵 16강 진출에 실패한 우리는 더 이상 함성지를 일도 없게 된 것일까. 철도·지하철파업은 끝났지만 그것이 불역쾌재라고 무릎을 칠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이 더 기다려진다. 장마철에 이루어지는 남북정상의 대좌는 한민족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하나씩 되새겨가며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겨레의 심신을 일신시켜줄 시원하고 통쾌한 이야깃거리를 새로 만들어내기를!<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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