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사열 등 생략 부인 대동않고 경호원 10명선/「경쟁」의식 철저히 실무중심/거리엔 자발적 환영시민… 관제 데모도 분단국가의 정상회담은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정상회담과는 여러 면에서 다를 것이다. 특히 의전절차와 진행이 여느 정상회담과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전통과 문화에 통역이 필요 없고 민족내부의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동족간의 정상회담이 의전과 격식을 중요시하는 일반적인 정상회담의 관례를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한민족 두나라의 정상회담의 의전은 훨씬 까다롭고 미묘하다고도 할 수 있다.
정상회담은 일단 상대의 존재와 체제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하지만 분단국가의 경우 공식 외교관계를 가진 상태의 회담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는 한때 전쟁 또는 대결, 상호비방과 경쟁의 관계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체제가 다른 지도자간의 직접적인 만남에 있어서는 매우 섬세하고 신중한 의전적 배려가 요구된다. 그러나 분단상황에서는 상대방 지도자에 대한 지나친 환대가 대내외적으로 미칠 심리적 영향과 「자존심」도 고려될 것이다.
역사적 첫 정상회담을 갖는 남북한은 다음달 1일 실무접촉에서 의전 및 경호문제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남북한보다 4반세기 앞서 민족정상회담을 한 바 있는 동서독의 경우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 3월19일 브란트서독총리는 국경을 넘어 동독의 에어푸르트로 가서 동독의 슈토프각료회의의장(총리)을 만났다. 브란트는 서독의 특별열차로 국경까지 간 후 그곳에서 객차는 그대로 두고 기관차만 동독 것으로 교체했다. 동독은 객실내 영접은 하지 않고 밖에서 슈토프총리와 공식수행원이 도열해 영접했다. 브란트는 총리전용차량을 가져가지 않고 동독의 의전차량에 슈토프총리와 함께 타고 회담장인 호텔로 직행했다. 경찰사이드카의 호위도 없었다.
국빈방문때 하는 도착환영식은 없었고 물론 국가연주와 의장대사열, 예포발사도 일체 생략됐다. 양국 국가연주와 국기게양은 체제가 다른 같은 민족의 정상회담중 가장 민감한 부분. 9차례 정상회담중 70년 두차례(동독에어푸르트, 서독 카셀)와 81년 베르베르 정상회담 때까지 국가연주는 서로 없었고 87년 본에서의 콜총리와 동독 호네커국가평의회의장의 4차 정상회담 때만 있었다. 의장대 사열 역시 마찬가지였고 예포발사는 한번도 없었다.
첫번째 회담때 회담장이자 숙소인 호텔에만 양국국기가 게양됐고 거리에는 국기를 달지 않았다. 총리 동승차량에는 양국국기를 달았고 회담장 테이블에도 동독의 의전관례에 따라 양국국기를 놓았다. 서독은 관례에 따라 한번도 테이블에 국기를 놓지 않았다. 9번의 정상회담중 거리에 상대방 국기가 게양된 적도 없었다.
동서독 정상은 항시 부인을 대동하지 않았다는 점도 일반 정상회담과는 달랐다. 첫번째 회담당시 서독의 공식수행원은 내독부장관, 내무부차관, 공보처장, 총리실 차관보등 5명이었고 비공식 수행원으로 총리비서, 연방수사국과장, 속기사, 의전관계자, 경호원등 15명 정도가 있었다.
동독시민들은 연도에서 자발적으로 브란트총리를 환영했고 일부 동원된 관제시위대가 동독승인과 신나치주의 철폐를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하루동안의 회담에서 환영오찬이나 만찬, 경축공연등은 일절 없었다. 공식초대만찬은 세번째와 네번째인 81·87년 정상회담때 있었다.
70년의 상호교환 정상회담 때 양측 정상은 유대인 집단수용소 기념관 방문헌화(브란트), 파시즘 희생자 위령탑헌화(슈토프)외에 다른 지역은 방문하지 않았다. 숙소는 1, 2차 때는 역에서 가까운 호텔이었고 3, 4차에는 영빈관을 제공했다. 서로 통신장비를 가져가 직통전화를 가설했고 1, 2차 때는 주치의를 대동하지 않았다. 체재 및 행사비는 초청자측이 모두 부담했다.
민족간 정상회담에서 돌발적 사태는 별로 우려하지 않은 듯 10명 내외의 경호원이 수행했고 무기의 명세를 상대방에게 통보한 후 반출입했다.
70년의 첫번째 상호교환 정상회담은 철저히 실무중심적이어서 정치적 경쟁관계를 의식한 다소 홀대에 가까운 의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호신뢰가 쌓여갈수록 의전의 모습도 점차 일반적인 정상회담의 품격을 갖춰나갔다.【파리=한기봉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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