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견해에 의하면 소설의 궁극적 존재 의의는 가능성으로 주어져 있는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는데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 최윤의 「푸른 기차」(「세계의 문학」 여름호)는 매우 고전적인 울림을 지닌 바로 이러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니, 「푸른 기차」가 제기하고 있는 물음은 정확하게는 현대 사회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물음 자체를 다시 한번 상기해 보도록 하자. 과연 고전적인 의미에서 삶이란 무엇이었던가? 아마도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삶은 그 자체가 실천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개인적 삶의 과정만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삶은 이렇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그러면서도 전체로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의 실천의 대상이기에 훨씬 앞서 우선 이해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남들이 이미 살았던 삶과 세계를 이해하려 하고 이것을 내 삶의 가능성과 무대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이렇듯 엄연한 일반적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윤의 「푸른기차」는 『삶이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이해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온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부정의 가능성이며 세계에 대한 부정의 가능성이다. 이 작품에서 삶과 인간과 세계는 회의와 부정의 가능성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현대 사회의 실상 또한 바로 이러한 것일 터이다.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회의와 부정은 구체적 사실의 사실성에 대한 회의와 「나」가 주체가 되어 이루는 행위의 부정으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군악대가 전자북을 두드리기 훨씬 전부터…』로 시작되는 문단은 결국 『군악대의 북소리는 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로 끝나고, 『그는 최소한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전화를 하지 않는다』에서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유일한 확실성은 시간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일 뿐이다.
『시간은 지나가버렸다. 그것은 확실해 보인다』
확실성은 과거의 것이고 현재는 온통 의외와 부정만으로 채워질 뿐이다. 그래서 「푸른 기차」는 막연한 가정법과 우울한 부정법으로만 서술된다. 그러나 「푸른 기차」는 이렇듯 무시무시한 부정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면서도 또한 이것만으로 끝난다. 상반되는 관점을 병렬시켜 말한다면 이러한 점이 이 작품의 미덕이자 한계일 것이다.<문학평론가·한국교원대 불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한국교원대 불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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