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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남·북예멘 분단서 통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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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남·북예멘 분단서 통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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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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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정상회담후 20­18년 걸렸다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북한주석간의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의 첫 디딤돌이 마침내 마련된 것이다. 분단의 역사적 배경과 행보는 다르지만 독일과 예멘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반목과 갈등을 극복하고 통일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독일과 예멘이 통일을 위해 가졌던 수많은 대화, 특히 정상회담을 통한 난제의 해결과정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정상회담 합의를 계기로 두 나라의 대화과정을 살펴본다.

◎예멘/72년 첫만남 국명·수도합의 “순조”/각료협상 수백회… 88년 국경개방

 대화와 합의를 통한 통일을 이뤄냈던 남북예멘은 또다시 내전에 휩싸여 재분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90년 통일당시 외세의 간섭없이 당사자간의 합의로만 「대등한 통합」을 성취했던 남북예멘의 통일협상과정은 같은 분단국가인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사회주의국가인 남예멘과 정통회교국 북예멘은 지난 72년부터 18년간 크게 보아 3단계의 통일협상을 진행시켰다. 1단계 협상(72∼78년)에서는 통일원칙에 합의했고 2단계(79∼85년)에서는 통일헌법안을 완성했다. 마지막 3단계(86∼89년)에서 통일준비기구 운영과 함께 국경일대의 비무장지대화와 석유공동개발에 합의하면서 결국 90년 5월22일 통일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같은 기간에 양측 각료급 사이에 진행된 협상만 수백여차례. 그러나 양측은 협상초기인 72년 11월26일 트리폴리에서 북측의 아리아니대통령과 남측의 루바이 알리대통령 사이에 첫 정상회담을 갖고 굵직한 난제들을 일거에 해결해버려 협상진전에 물꼬를 텄다. 양측정상은 이 자리에서 통일국명(예멘공화국) 국기(적·백·흑 3색기) 수도(사나)의 단일화등에 공식합의함으로써 통일을 향한 일보를 내디뎠다.

 이 정상회담 1개월 앞서 아랍연맹의 중재로 열린 양측 총리급을 수석대표로한 예비실무회담에서 정상회담의 의제 및 회담형식, 통일을 위한 공동전문위원회의 구성등에 합의함으로써 추후 통일협상의 초석을 다지게 됐다.

 이후 양측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각료급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통해 상시 협의체제로 통일협상을 이끌면서 정상회담을 정례화하는등 진전을 이뤘다. 양측 정상은 72년 트리폴리 정상회담이후 외부 중재자없이 20여차례 회동하면서 자주적인 「통일해법」에 차근차근 접근한 것이다.

 물론 체제지향점이 다른 남북예멘 사이의 통일협상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상호간의 깊은 불신은 72년 9월과 79년 2월등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국경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내부적으로도 양측은 강경파의 쿠데타등으로 극심한 정정혼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아라비아반도내 최대 단일민족인 1천3백만 남북예멘국민의 통일의지는 81년 아덴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적인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압둘라 살레 북측대통령과 알리 나셀 남측대통령은 이 회동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화해무드를 조성했고 이는 결국 88년 국경개방 및 유전공동개발등 실질적인 합의로 이어졌다.

 국제적인 환경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던 남예멘이 소련의 붕괴에 따른 원조중단으로 경제난에 직면하자 북예멘에 통일을 앞당기자고 제의함으로써 23년간의 분단상황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90년 10월 흡수통일방식을 취한 독일통일에 앞서 민족자결에 의한 「1대 1」의 동등한 통합을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통합당시 북지도자인 살레를 국가수반으로 출범한 새 정부는 통일이후 불거져온 갈등과 반목을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 남북간의 기계적인 권력배분은 지도부의 분열상을 노출시켰고 상대적 빈곤에 시달려온 남예멘 주민들의 경제적 불만은 날로 고조됐다.

 결국 부패한 관료체제의 정리와 차별대우철폐등을 내세운 남측의 개혁요구가 거부되자 통일정부는 붕괴되고 또다른 내전의 수렁으로 치닫고 있다. 통일이후 4년째를 맞는 예멘이지만 남북측 각각 27만·38만명의 정규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갈등의 불씨」는 그대로 전면적인 무력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현 남예멘지도자인 알 바이드는 지난달 21일 아덴을 수도로 하는 독립국인 예멘민주공화국 창설을 선포한 뒤 임시구국 의회구성 및 1년내 총선실시방침을 천명한 상태다.

 오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 외세에 의한 분단, 동족상잔의 내전경험등 우리와 많은 공통성을 지닌 예멘의 사례는 통일과정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볼 수 있다.【이상원기자】

◎독일/70년 시작… 「상호주의」로 동서왕복/경제교류로 물꼬… 87년 여행자유

 지난 45년 8월 연합국에 통치권을 이양하면서 분단됐던 동서독은 70년 3월 첫 정상회담이래 90년 10월 재통일될 때까지 20년동안 9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분단이후 25년만인 70년 3월19일 성사된 브란트 서독총리와 슈토프 동독총리간의 역사적인 첫 대면은 그동안 줄기차게 시도된 쌍방협상의 산물이었다.

 세계적인 데탕트와 브란트의 동방적책으로 대화의 필요성을 느낀 동독은 69년 12월 서독에 「동독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정상회담의 계기를 마련했다.

 브란트는 이에 양측 지도자들이 직접 만나 현안을 논의하자는 역제의를 담은 서한을 70년 1월 슈토프에게 전했다. 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동의한 슈토프도 2월19일에 동베를린에서 만나자는 서한을 서독측에 보냈으며 서독은 국내절차와 우방과의 협의문제등을 이유로 3월개최를 제의했다.

 두 정상의 회담동의에 따라 개최장소와 날짜를 협의키 위해 각각 총리실실장을 대표로 내세운 양측은 3월2일부터 동베를린에서 4차례 실무예비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장소문제를 놓고 서독측이 2시간동안 회담장을 철수하는등 진통을 겪기도 했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제안한 반면 서독은 동독내 지역까지는 양보하지만 「독일은 하나」라는 논리를 펴면서 동독수도에서의 개최에는 반대했다. 결국 양측은 절충끝에 동독의 국경도시 에어플로트에서 3월19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첫 정상회담에서 서독은 동독의 국가승인요구를 거부했지만 동서독 어느 쪽도 전체 독일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주장할 수 없다며 「전독대표권」을 포기했다.

 상호주의원칙에 따라 5월21일 서독의 국경부근 카셀에서 열린 2차회담에서도 브란트가 제시한 양독관계개선을 위한 협정초안을 동독이 거부하는등 양측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실무차원에서의 대화를 꾸준히 전개해 드디어 72년 12월 양독기본조약체결, 73년 9월 유엔동시가입, 74년 3월 상호대표부개설등을 이루어냈다.

 동서독은 이후 11년만인 81년 12월11일 동독의 베르베르에서 슈미트 서독총리와 호네커 공산당서기장간의 3차 정상회담을 열었다. 슈미트가 79년 2월 제의한 뒤 폴란드사태등 외적 요인 때문에 두 차례나 연기됐던 이 회담에서 서독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인적·경제교류를 제안했다. 이 회담후 양측은 상호협력촉진에 관한 고위급회담을 잇달아 개최, 82년 11월 함부르크와 베를린을 잇는 고속도로가 개설되는등 통일의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한편 87년 9월7일 동독국가원수로는 분단이후 처음으로 서독을 공식방문한 호네커와 콜총리간의 제4차 정상회담은 통일을 향한 청사진을 마련한 자리였다. 국내외 문제로 3번이나 취소된 끝에 열린 이 회담에서 두 정상은 의례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11쪽에 이르는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동서독은 양독간의 여행자유화와 동독주민의 인권신장과 함께 ▲동서독간의 과학기술협력 ▲환경보호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등 3개항에 합의했다.

 89년들어 양국은 10월18일 호네커실각, 11월9일 베를린 장벽붕괴등 숨가쁘게 전개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12월19일 콜총리와 모드로 동독총리간의 동독 드레스덴 제5차 정상회담을 개최, 사실상 통일의 길에 접어들었다.

 통독에 관한 양국정부의 입장을 「통일」하기 위한 첫번째 시도로 열린 이 회담에서 양측은 콜총리가 제안한 10개항의 통일방안에 잠정적으로 합의하는등 통일기반을 구축했다.

 이후 양독은 90년들어 ▲2월13일 콜―모드로 서독 본회담(제6차) ▲4월24일 콜―드 메지에르 본회담(제7차) ▲5월18일 콜―드 메지에르 본회담(제8차) ▲7월31일 콜―드 메지에르 오스트리아 정상회담(9차)을 거쳐 10월3일 서독기본법 제23조에 의거, 서독에 의한 동독흡수방식으로 통일독일을 달성, 분단시대를 마감했다.【이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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