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의 삶 소설로 쓰고 싶었죠”/“글쓰기의 의미 자문시점서 상받아 기뻐/40세까진 사명감갖고 「실험」계속” 단편소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로 「제27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구효서씨(36)는 컴퓨터의 권력화, 예술가의 소시민화 등 이 시대상을 꿰뚫는 작품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일찍이 90년대 문학의 기수로 지목돼 온 작가이다. 그의 존재를 문단에 각인시킨 소설 「아이 엠 어 소피스트」는 컴퓨터라는 문명의 이기가 오히려 인간을 옭매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음을 간파한 작품이며, 소설가의 일상을 파헤친 「당신의 바다는」 「편지 읽는 여자」등은 문단에 이른바 「소설가 소설」 붐을 일으켰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은 일상에 찌들고 무력해진 소설가의 삶을 보여주는 「소설가 소설」인 동시에 일상에서 도피하고 싶은 보편적 초월 욕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순수소설은 대중으로부터 유리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소설가로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가 들었지요. 화려한 영상문화에 밀리고 있다는 소외감도 들고요. 소설가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기고, 나 자신의 삶을 소설로 형상화하고 싶었습니다. 잘나고 고귀한 소설가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사는 보통사람이면서 소설을 쓰는 사람의 이야기가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깡통따개가…」에 등장하는 소설가는 그 자신처럼 소설쓰기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이다. 다른 벌이 없이 소설만을, 그것도 순수소설만을 쓰는 작가가 경제적으로 넉넉할 리 없다. 너무나 범속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임신한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놓고 어느 암자로 떠난다.
산꽃이 피어 있는 암자에서 그는 꽃을 꽂아놓을 깡통을 줍는다. 꽃을 꽂을 수 있도록 깡통에 구멍을 내기 위해 깡통따개를 찾아 나선다. 암자 근처에서는 구할 수 없어 대전까지 가서 깡통따개를 구해왔는데, 암자에 와 보니 한 사내가 녹슨 호미를 이용해 깡통을 아주 쉽게 따고 있었다.
그 사내는 인기스타를 꿈꾸는 탈출사였다. 몸을 아무리 꽁꽁 묶어도 스스로 풀어낼 수 있는 희한한 재주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에서 밥을 얻어먹기 위해 주지스님의 구박을 감내해야 한다.
둘째 애가 낚시바늘을 삼켰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암자를 급히 나서는 「나」에게 탈출사는 유명 연예인처럼 사인을 해주면서 후에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한다. 버스에서 내린 주인공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어떡하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나」와 탈출사는 작품의 두 줄기를 이루면서, 현실을 벗어나려는 시도와 현실적인 이익 때문에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보통사람들의 꿈과 또한 일상으로의 안락한 회귀성을 대변한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나」는 집으로 돌아오고, 절에서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탈출사는 인기스타의 꿈을 유보하고 주지스님의 말을 고분고분 따른다. 아내에게 자신의 위치를 물어보는 「나」는 소설가적인 방황과 탐색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디」를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해체적이고 실험적인 글에서부터 서민들의 삶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소재와 기법의 작품을 발표해 왔다.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의미 있는 일인가 묻고 있던 시점에 상을 받게 돼 기쁘다. 40세까지는 실험을 계속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한때 국어교사, 출판사 직원을 해보았지만, 지금은 글쓰기만을 고집하는 전업작가이다.
작품속의 주인공은 「소설쓰기란 결국,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이거나 진지한 것을 하찮게 생각하기 중의 하나」라는 냉소적인 말을 뱉기도 하지만, 그 자신은 『소설가라는 직업에 사명감을 갖는다』고 말했다.【이현주기자】
◎심사평/“참신성과 진지함이 묘하게 혼합된 작품”
5월20일 한국일보 송현클럽에서 첫번째 모임을 가진 심사위원회는 이 상이 지난 1년간 발표된 작품 가운데 한국문학의 창조적 가능성을 새로이 개척한 작품에 수여된다는 원칙을 다시 확인하면서, 작품목록을 검토하여 12편의 작품을 선정하여 본심에 올리기로 합의하였다.
6월2일의 두번째 모임에서 심사위원회는 공선옥의 「목마른 계절」, 공지영의 「꿈」, 구효서의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김인숙의 「칼날과 사랑」, 윤대녕의 「은어낚시 통신」에 주목하였다. 5작품 모두 난형난제의 형국이어서 토론을 거듭하였다.
공선옥은 80년대 민중문학에 뿌리를 두면서도 특이한 자질을 갖춘 작가라는 데 모두 공감하였다. 통상적인 빈궁소설에서 벗어난 이 작가의 건강성에 유의하면서도 심사위원회는 그가 아직은 신인급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작업의 추이를 좀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매혹적인 문장으로 독자를 흡인하는 윤대녕은 참신성이 빛났지만 아직까지의 작업만으로는 참신성이 가벼움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미덥게 하지 못한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공지영과 김인숙은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작가다. 운동의 위기를 여성의 시각이라는 근본적 관점에서 끈덕지게 파고드는 두 작가의 진지함은 이 경박한 시대에 우리 문학의 드문 자산이라는 점에 심사위원 모두 동감하였다. 그러나 그 진지함은 아직 답답함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는 데서 앞으로의 작업에 기대를 걸었다.
이 점에서 참신과 진지가 묘하게 혼합된 구효서에 다시금 유의하였다. 별빛이 사라진 이 황폐한 시대에 「길」을 찾아 막막한 도정에 선 작가의 운명과 그 도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운명을 물기어린 필치로 그려낸 이 작품은, 물론 참신과 진지의 통일에 아직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입구에 서 있다고 판단하여 수상작으로 삼는다.【심사위원=박완서 김윤식 오생근 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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