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철수 등 겨냥한 「고정 레퍼토리」/54년 첫제시후 40년동안 되풀이 주장/전시 동원능력 우위바탕 계산된 포석 북한의 김일성주석은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전미국대통령을 통해 ▲남·북한군을 10만명 수준으로 줄이고 ▲그에 비례하여 주한미군도 감축하며 ▲비무장지대에서 병력을 완전 철수시키자고 제안했다. 이를 두고 카터전대통령은 『역사적이고 의미있는 새로운 제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국내 군사전문가들은 두사람의 대화에 거의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김일성의 제안은 북한이 40여년간 되풀이 해온 「고정 레퍼토리」일 뿐이며 카터의 평가는 무지의 결과라는 것이다.
북한은 54년 6월 제네바에서 당시 외상 남일을 통해 남북한이 서로 군대를 10만명으로 줄이자는 제안을 처음 내놓았다. 남한이 10만여명 북한이 20여만명의 병력을 보유했을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북한은 「10만명 군축」을 줄기차게 주장해오고 있다.
김일성은 60년 8월 직접 이 제안을 했다. 이어 73년 3월 열린 제2차남북조절위원회에서 북한의 박성철은 병력을 10만명 이하로 감축할것등 5개항을 제시했으며 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도 김일성은 감축문제를 언급했다.
80년대 후반들어 북한의 군비통제 제안은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87년 7월 미국의 레이건행정부가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군축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자 북한은 정부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은 이 성명에서 ▲북과 남은 88년부터 91년까지 3단계에 걸쳐 군사력을 각각 10만명으로 줄인뒤 92년부터 10만명이하로 유지할것 ▲북과 남이 병력을 단계적으로 축소함에 따라 주한미군도 단계적으로 철수해야 하며 핵무기와 기타무력도 철수할것 ▲비무장지대에서 무력충돌을 막기위해 그 지대를 참된 평화지대로 만들것등 단계적 군비축소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이번에 카터에게 내놓은 감축제안과 똑 같은 내용이다. 북한은 90년 5월31일 군비통제에 관련한 모든 제안을 한꺼번에 모은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을 발표했으나 그내용과 기본입장은 이전과 달라진것이 거의 없었다.
남북한이 군비통제를 주제로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한 것은 90년9월5일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부터다. 남북한은 92년 9월 8차고위급회담때까지 군사분과위원회를 열어 군축문제를 논의했으나 이 회담을 끝으로 대화는 중단된 상태다. 북한핵문제 때문이다.
우리측이 군비통제를 추진해 나가는 기본방향은 『선신뢰 구축 후군축』이다. 한국은 정치적 및 군사적 신뢰구축을 이룬뒤에 투명성과 합의를 기초로 병력감축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끈질기게 병력감축 우선을 주장하는것은 ▲대남 군사력 우위 ▲병영화된 사회체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전략등의 이유라고 군사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가령 병력 10만명 상태에서 북한은 24∼72시간이면 예비병력을 총동원할 수 있으나 남한은 10일 이상 걸리므로 북한은 감축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는것이다.
김일성이 이 시점에 또다시 감축문제를 들고 나온것은 핵문제의 관심을 돌리고 주한미군 전력증강과 증파논의를 무마하기 위한 평화제스처로 보인다. 나아가 미국과 직접 대화를 하면 군대까지 줄일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 대미직접협상을 위한 포석을 놓는 고도의 계산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북한의 전략에 어두운 카터전대통령이 말려들었다는것이 군사전문가들의 분석이다.【손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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