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세대에게 두만강은 관념속의 강이게 마련이다. 만주벌판을 달리는 고구려인의 웅혼한 기상, 해동성국 발해의 찬연한 문화, 이주민들의 설움, 일제에 대한 분노, 심지어 분단의 아픔도 책 속에 머물러 있다. 두만강취재의 어려움은 책 속의 강을 어떻게 「우리의 강」으로 현재화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또 다른 어려움은 통시적 시차적응문제였다. 한민족생활사의 여러 연대가 공존하는 두만강을 찾는 일은 길따라 물따라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간단없이 넘나드는 시간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천진발 연길행 비행기에서부터 시차적응의 강박감이 시작됐다. 영화에나 나올 법하게 낡은 구소련제 48인승 쌍발 프로펠러기는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같았다. 고장난 좌석 등받이에 기댄채 기내식으로 받은 잣과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사이 비행기는 점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두만강 물줄기는 백두산기슭 중국측 발원지로부터 동해까지 1천3백리. 그러나 실제 취재거리는 그 5배를 넘었다. 숭선, 노과, 방천등 강변도시와 소읍, 강 따라 형성된 조선족마을을 지나며 숱한 사연을 주워 담았다. 청산리, 봉오동, 명동촌, 농정, 연길등 만주일대 조선족의 발자취가 있는 곳은 모두 두만강 강역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여정에 포함됐다. 지척에 보이는 북한땅 무산, 회녕풍경과 조선족 장사꾼들은 북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5월초에도 을씨년스럽던 겨울분위기는 금세 초여름으로 바뀌었으나 강변의 공기는 늘 싸늘했다. 최근 남북관계의 긴장이 더욱 팽팽해진 때문이다.
두만강을 다녀온 지금 관념의 문제, 시차의 문제 두 가지 모두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을 뿐이다. 두만강을 다녀온 사람은 전과 같지 않다. 가슴 속에 또 하나의 두만강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 강은 단순한 국경하천이 아니라 민족의 삶과 역사를 아우르는 총칭이며 무심히 내뱉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탄성으로 슬픔과 바람을 길어 올리는 보통명사이다. 눈을 감으면 가만히 내부의 떨림으로 울려 오는 「아아 두만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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