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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친 단절의 강… 가야할 기약의 강(두만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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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친 단절의 강… 가야할 기약의 강(두만강:1)

입력
1994.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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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물」 간데 없고 맺힌한 탁류되어… 두만강은 푸르지 않다. 백두산기슭 발원지에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상류쪽만 그런대로 「두만강 푸른 물에…」라는 김정구의 노랫말다운 물빛을 띠고 있을 뿐이다. 그 아래로는 오염에 찌들대로 찌든 검은 탁류가 동해까지 이어지고 있다.검은 강물은 어쩔 수 없는 두만강의 현실이다. 그러나 물빛깔이 어떻든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두만강은 현실 너머에 있다.

 여울마다 모래톱마다 또는 강변 고갯길마다 절절하게 녹아 들어 있는 우리 삶의 끈끈한 자취들이 두만강을 현실의 강이 아닌 이미지의 강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강을 따라 이루어진 한민족의 역사가 어찌 한과 설움뿐이랴마는 우리 정서속의 두만강은 1870년대 이후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민족수난사와 겹쳐진 모습이다.

 실개천이 마을하천쯤으로 넓어진 뒤 비로소 두만강이 강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 개산둔(개산툰으로 읽는다)지역 중류에 통한의 섬 간도가 버려진듯 자리잡고 있다. 말이 섬이지 고구마모양의 작은 강상 퇴적지에 지나지 않는 이곳이야말로 만주벌판으로 흩어져간 조선족 이민자들의 첫 발길이 닿은 곳이며 두만강이 상징하는 한과 설움의 발원지이다. 한 줌의 곡식과 감자 몇 알을 위해 밤이면 목숨을 걸고 이 사잇섬을 디딤돌삼아 강을 건너던 참담한 가장의 모습은 이제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만주의 혹독한 북풍에 이지러진 버드나무 사이로 군데군데 눈에 뛰는 억새밭만이 무심한 세월을 속절없이 증거하고 있을뿐이다.

 세대를 뛰어 넘어 국민가요가 되어버린 김정구의 「두만강」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작사자 김용호는 35년 당시 간도에 이웃한 선구마을 나루터에 들렀다가 일경에 의해 옥사한 남편을 따라 바로 그날 이곳 두만강에 몸을 던진 조선아낙의 애달픈 사연을 노랫말로 지었다. 예사롭지 않게 태어난 「두만강」노래는 두만강을 더욱 두만강답게 만들었다.

 그 옛날 조선이주민의 행로를 좇아 간도를 등지고 만주벌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 험준한 산령이 앞을 막아 서고 계곡과 능선을 따라 실타래처럼 풀려 있는 길이 아스라하게 눈에 잡힌다. 아흔아홉 굽이마다 어느 한 곳 눈물 배지 않은 땅이 없을 이 고개가 바로 한많은 아리랑고개다. 남부녀대한 초라한 행렬에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설렘따위는 애초부터 있을리 없었다. 두고 온 고향생각만으로도 서러운 이주민들에게 흉악한 비적들의 잦은 출몰은 큰 위협이었다. 그들이 고개를 넘으며 부르던 「집 잃고 밭 잃은 동무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보냐」라는 「아리랑」가락에는 그래서 구슬픈 한이 서려 있다.

 아리랑고개를 힘들여 넘은 이주민들은 논밭을 일구어낼만한 땅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건 뿌리를 내렸다. 선구자의 땅 농정도 그런 곳이다. 용정벌 넓은 들판 한 켠에 솟은 비암산 꼭대기 일송정에 서면 벌판을 가로질러 용틀임하듯 휘어져 흐르는 두만강의 지류 해란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석양이 만주의 흙먼지를 붉게 물들일 때면 해란강 물줄기를 따라 말 달리는 선구자의 비장한 모습이 손에 잡힐듯 환영으로 떠오른다.

 강을 건넌 그들 모두에게 두만강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강, 기약의 강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만강은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닫혀 있다. 중국과 북한의 두만강하류 통상로인 도문해관에서는 오늘도 핏줄이 헤어지는 애끊는 이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시간이 멎어 있는 것같은 두만강에는 여전히 눈물이 섞여 흐르고 강가에서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고 있다.

 두만강은 그런 곳이다. 두만강변 어느 마을에건 들러 누구를 붙들고 얘기를 건네든 한스런 사연이 끝없이 풀려나오는 곳이다. 두만강 물길을 따라가는 것은 그러므로 두만강이 상징하는 민족정서의 실체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발치를 흐르는 강물은 검은 빛이지만 돌아서 떠올리면 다시 푸른 빛이다. 현실 너머에 있는 우리 속의 두만강은 더럽혀져 있지 않다. 두만강은 언제나 푸른 물이다.<특별취재반:권주훈 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열기자(기획취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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