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6·25시대의 고질병/박완서칼럼(화요세평)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6·25시대의 고질병/박완서칼럼(화요세평)

입력
1994.06.21 00:00
0 0

 복중보다 더 뜨겁던 유월 어느날, 시내에 나갔다 오는 길에 상가에 들렀다. 강남의 슈퍼마켓마다 라면과 부탄가스가 동이 난 광경을 TV화면으로 보고 난 다음 날이었다. 사재기열풍이 일단 진정된 건지 우리 동네가 부촌이 아니어서 그런지 평소와 다름없이 라면을 비롯한 먹을 것들이 산적해 있는 걸 보고 괜히 열없어져서 9백원짜리 국수를 한 봉지 샀다. 상가를 나와 계속되는 가뭄으로 잔혹하게 달구어진 햇볕아래 서니 또 유월이구나 하는 생각이 지병처럼 둔탁하고 기분 나쁘게 도지는 걸 느꼈다. 다행히 사재기소동은 북한을 방문한 미국의 전직대통령이 꽤 괜찮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그 많은 라면을 언제 다 먹어 치우나 하는 팔자좋은 걱정으로 감쪽같이 바뀌고 그동안 등치고 배만지는 식으로 위기의식을 부추겼다 안심시켰다 종잡을 수 없이 굴던 언론은 이제 그 탓을 우리의 안보불감증을 답답해하던 미국언론으로 돌리면서 발을 뺐다. 도대체 미국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우방인 동시에 구경꾼이다. 구경꾼이란 어차피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게 돼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화끈한 구경에 굶주린 구경꾼이 오를듯 오를듯 안오르는 막 앞에서 휘파람 좀 불었기로서니. 공장이나 상가의 창고에 쌓였던 라면이 바닥이 났다고 해도 개인집으로 분산된 것일뿐 내 나라안의 일이다. 강남의 일부 부유층이라는 단서까지 달아가며 발뺌을 해야 할 큰 잘못도 아니고 그렇게 되게끔 은연중 몰고 간 언론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그동안 들은 풍월로 상식같이 된 원자력을 비롯한 최신무기에 대한 지식으로 「만약에 전쟁이 난다면?」을 가상하건대 누가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피차의 생명의 씨가 절멸하게 돼 있다. 그런데도 안보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우선 먹을 걸 챙기고 피란갈 궁리를 하게 되는 것은 언론이나 정부의 일관성없는 태도보다는 집집마다 아직은 한두명씩 생존해 있는 6·25세대의 입김때문이 아닐는지. 그런 귀찮은 어른이 없는 집안이라 해도 6·25때 어쩌구 저쩌구, 이만저만했었다는 굶주림과 구사일생담을 듣지 않고 자란 한국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직접 들을 기회가 없었던 제3세대라고 해도 잠재의식속에라도 남아 있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질 만큼 체험세대는 후손에게 끈질기게 그 얘기를 했다. 그렇다고 그걸 투철한 반공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할지는 몰라도 맞는 말은 아니다.

 당시의 노대통령은 늘 북진통일을 장담했었다. 그러나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들은 게 6월 25일인데 28일 새벽에 우리는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는 어마어마한 탱크부대와 여염집의 골목골목을 수색하는 인민군의 따발총을 보았다. 20세 미만의 인민군까지도 그들이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얼마나 철저한 전쟁준비를 했는지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우리는 석달동안이나 그들이 우리를 해방시키러 왔다는 선전선동공작을 들으면서 죽어가고 끌려가고 하였다. 그러나 국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떡먹듯이 약속하고 저희들만 도망간 정부는 서울수복후 너무도 교만하고 당당하여 남아서 고생한 시민을 위무하기 전에 분풀이부터 했다. 살아 남은 것도 죄가 되는 시기였다. 총칼과 폭격으로도 수많은 목숨이 죽었지만 반동이라는 또는 빨갱이라는 미친듯한 광기로 또 얼마나 많은 인명이 초개같이 스러졌는지. 동족의 가슴팍에 거침없이 탱크를 굴려오는 정부도 치가 떨리지만 그런 적에게 전혀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저희끼리만 도망간 정부도 용서할 수가 없었고 그게 정부에 대한 불신감으로 정서화돼버린 것도 우리 6·25세대의 비극이요 상처이다. 북측이 협상 테이블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우리 정부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이상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먼저 북침을 시도했다는 그들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혐오감을 지나 절망감마저 느껴왔다. 군사정권하에서 끈질기게 민주화운동을 해온 운동권을 심정적으로 지지하고 이해하다가도 일부 과격한 학생중에서 우리가 먼저 북침했다는 북측의 주장을 믿는 발언까지 나올때면 맥이 풀리고 혐오감까지 느꼈던 것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때문일 것이다. 운동권이 광주의 원흉을 잊지 못한다면 수백만의 무고한 희생을 낸 미친 짓을 누가 먼저 일으켰나도 마땅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침이 틀림없다는 구소련의 비밀문서가 우리에게 공개됐다고 해서 새삼스러운 발견처럼 떠들어대는 우리의 태도는 더군다나 웃긴다.

 우리가 평화유지를 믿는 마음은 미국이란 강대국의 빽을 믿는 마음과 거의 동일하여 씁쓸한데 주체가 종교인 김일성주석조차 우리 대통령과의 만남도 우리가 제의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다가 미국의 전직대통령한테는 선선히 그 용의를 비친 걸 보면 우리와 형태와 계산만 다를 뿐인 의존을 보는 것같아 낯간지럽다. 성사가 돼야 되나보다 할뿐, 김주석이라면 카터쯤 등신으로 만드는 게임도 불사하리라는 예측도 가능해 조금도 들뜨고 싶지 않은 것도 6·25세대의 뿌리깊은 불신감 때문일까. 설사 만남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그들이 사랑하는 국민은 물론 이 아름다운 강산에서 생명의 씨가 마를지언정 우리가 믿는 강대국은 다만 구경꾼일뿐 털끝 하나 안 다치고 그걸 즐기기조차 할 수 있다는데만은 양측 수뇌가 서로 공감하고 있기를 기도하듯 바랄뿐이다.<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