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서 만난 이림씨(62)는 중국인민해방군에서 운영하는 왕부국제여행사의 부사장이다. 몸이 자그마하고 부드럽게 보이는 그는 예비역 대령인데, 며칠동안 자주 만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구가 고향인 그는 12살 때인 1944년 부모를 떠나 연길로 왔다. 그러나 일제의 억압과 가난에 쫓겨 국경을 넘었던 그들 가족의 꿈은 해방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처참하게 깨졌다.
일제가 패망하자 중국대륙에는 국공내전이 벌어졌고, 만주 일대는 치열한 접전지였다. 1946년 국민군은 일인포로를 앞세워 연길의 조선족 마을을 습격한 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당시 조선족은 대부분 가난했고, 공산당은 소수민족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선전에 솔깃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국민군은 조선족이 홍군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 중국인 친구집에 놀러 갔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고아가 된 나는 홍군을 따라 북경까지 올라갔고,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후 군에 들어갔다. 14살짜리 조선족 고아를 보살펴 주고 교육시켜 준 것은 사회주의였다. 나는 한 평생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2년전 대구에 가서 어릴 때 같이 놀던 사촌등 친척들을 만났다는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것이 우리민족의 역사였지요』라고 한 마디로 대답했다.
같은 여행사에서 일하는 박금자씨(31)는 북경에서 급행열차로 22시간이나 걸리는 내몽골의 우란호트시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짓고 있는 그의 부모는 4남매중 막내인 그가 고등학교를 마치자 연변으로 보냈고, 그는 연변대학에서 조선문학을 전공하면서 연변출신 동포청년을 만나 결혼했다. 그의 남편 장춘식씨(36)는 북경민족학원을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인데, 평론집 「시대와 문학」등 몇권의 저서를 가진 동포사회에서 잘 알려진 작가다.
연변에서 대학을 다니는 4년동안 방학이 되면 33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달려가곤 했다는 그는 총명하고 활달하다. 우란호트에서 마침내 북경으로 진출하여 여행사 부장으로, 관광가이드로 바쁘게 뛰고 있는 그는 한국여성의 전통적 미덕과 진취성을 함께 보여 준다.
계림에서 만난 관광가이드 박옥화양(19)은 한국어가 서투르지만 유머감각이 있는 귀염둥이다. 그의 조부모는 1941년 중국에 와서 계림에 정착했다. 계림에 우리 동포가 없었으므로 그들의 네 자녀는 중국인들과 결혼했고, 한국어를 배우지 못했다. 옥화의 할머니는 6년전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 『많은 자식들과 손자 손녀중 한 사람도 우리 말을 못하는 것이 늘 부끄럽고 가슴 아팠다. 막내 손녀 옥화만은 우리 말을 배우게 하라』는 유언을 했다.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연변에 가서 3년간 우리 말을 배운 옥화는 지금 관광가이드로 동포들을 맞으며 새롭게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할머니가 민족심이 매우 강한 여성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수난이 많았던 우리 민족, 그중에서도 여성이라는 2중의 수난을 견뎌낸 조선족 여성은 얼마나 강인한가. 중국에서 동포여성들을 만나며 새삼 감탄하게 된다.<북경에서·편집위원>북경에서·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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