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이후 경제가치가 삶을 지배/물신사회는 소외·불신·환경파괴 낳아/원시 「호혜」와 시장「교환질서」 보완필요/「지역 열린공동체」의 힘으로 「따뜻한 경제」만들어야 나는 경제학을 잘 모른다. 경제학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학생시절부터 나는 경제학에 대해 일종의 혐오감 비슷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것을 생산력이나 GNP로 설명하는 경제학이 왠지 마땅치 않았다. 경제라는 본디의 말이야 얼마나 좋은가! 경세제민 아닌가! 그러나 근대경제학, 현대경제학이 과연 경세제민의 큰 뜻에 합당한 것일 수 있는가?
얼핏 보아서도 근대경제학 현대경제학은 삶의 가치, 생명가치를 놓쳐 버렸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생명가치란 무엇일까? 생명가치란 생명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생명과정이 통합되었을 때 탄생되는 가치다. 생명과정이란 또 무엇인가? 생명은 본디 다양성, 순환성, 관계성을 그 본성으로 한다. 이 세 가지 본성이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 곧 인간의 광의의 노동,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신용, 인간과 자연사이의 토지(삼림, 하천등)소유관계다. 근대경제학의 기획에 따라 국민국가의 공권력이 개입한 근대화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근대화는 국민경제에 의한 전국시장의 획일적 통합을 뜻한다. 그 결과 지역적 삶은 해체되었고 지역적 삶의 생명과정인 노동, 신용, 토지관계는 해체되어 전면 상품화되었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이것들을 전면 계획경제 속에 군사화 해버렸다.
인간의 자기소외,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불신과 경쟁과 상호도태, 인간과 자연사이의 분열 곧 엄청난 환경파괴가 나타났다. 생명과정의 붕괴요 생명가치의 상실이다. 삶 전면을 경제가치가 지배하게 되었으며 밥은 좀 먹고 돈은 좀 벌게 되었으나 도대체 「살 맛」 안 나는 세상, 생명이 경시되는 세상, 물조차 마음놓고 마실 수 없는 생태파괴의 기괴한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장적 삶은 두려운 것이요 차가운 질서가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냉혹한 세상. 그것이 시장적 삶이다.
나는 지금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시장을 거부할 생각은 없다. 브로델의 말처럼 시장은 인류문명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제도나 이념보다도 더 오래된 파장이다.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없어지더라도 시장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생명이 생명답게 존중되며 자연이 자연답게 보존되려면 시장이 바뀌어야 한다. 차가운 경제에서 따뜻한 경제로, 이른바 물신경제에서 도덕경제로 변화해야만 할 것이다.
삶은 거룩한 것이다. 상품화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정체성이요 인격적 사회관계요 그리고 자연생명이다. 이 거룩한 삶을 거룩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성스러운 시장을 꿈꿀 수는 없는 것인가? 시장의 성화. 장바닥에 비단을 까는 일. 이것은 인류의 문화와 종교가 발생한 이래 영속되어온 모든 지혜자들의 꿈이었다. 모든 고등종교에 나타나는 「후퇴―복귀」리듬, 「산과 저자」사이의 관계는 이 꿈을 증명한다.
나는 생각한다. 불교의 승가는 일단 깨달은 자들의 공동체이지만 시장의 냉혹한 교환질서를 바꾸고자 하는 대안으로서 세워진 것이라고. 나는 주목한다. 고대의 승가는 폐쇄적 공동체가 아닌 열린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었고, 여기에 참여 못하는 저잣거리, 곧 시장의 재가신도들은 승가를 모범으로 하여 그들의 세속생활을 개혁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빈틈없는 교환질서가 지배하는 시장에 대해 산과 승가는 여백이었고 틈이었다. 냉혹한 시장, 약육강식과 도태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버틸 수 없어 몸과 마음이 지친 중생들에게 산과 승가는 숨쉴 수 있는 마지막 여백이었고 틈이었다.
오늘날에도 고등종교의 이같은 청량한 역할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면에서 속인들이 교환질서가 아닌 호혜가 지배하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는 여백과 틈은 없는 것일까? 나아가 호혜가 지배하는 공동체적인 따뜻한 경제와 시장의 교환질서가 공생할 수 있는 상보적 관계는 창조될 수 없는 것일까? 끊임없는 호혜와 재분배의 꿈을 추구하는 열린 공동체의 여기저기 다양한 시도와 실천들이 시장의 차가움을 수정하여 점차적으로 시장을 따뜻함이 스며드는 거룩하고 신명나는 삶의 터전으로 바꾸어 갈 수는 없는 것일까?
시장은 기계적 구조로 이루어진 축조물이 아니라 산 생물이다. 생명의 관점, 생물학적 관점, 생태학적 관점에서 시장을 다시 보자. 시장은 오류를 허용하는 생태를 본성으로 한다. 계획경제가 한 치의 오류도 인정치 않는 딱딱한 체계인데 반해 시장은 오류를 인정하며 자기를 수정할 수 있는 유연하게 살아 있는 개방계다. 그래서 시장은 끊임없는 자기쇄신을 통해 진화해 왔고 또 진화해갈 것이다. 시장은 따라서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장소다.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고 새로운 문이 열려 새 시대를 열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소경동맹적 파충류조직이라면 시장경제는 여백을 허용하며 여백에 의해 새 기류와 급변에 적응하여 자기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포유동물적 자유를 지니고 있다.
환경운동의 급성장과 환경파괴의 압력이 거세지자 시장은 생태적 지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온갖 에너지 대체기술이 개발되고 생태산업이 발전하여 이제는 「그린」이나 「환경」, 「생명」등의 상표와 광고가 판을 치는 진풍경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시장을 수용자―소비자모티브가 지배하는 장소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환경위기와 환경운동이 시장을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루돌프 바로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환경개량주의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근본생태주의적인 열린 공동체의 더 깊고 넓은 확산과 시장의 끊임없는 개량주의적 자기수정 사이의 상보적 관계의 인식과 창조만이 지구평화와 인류생존의 「살림의 길」이라고 믿는다.
공자와 봉건제사회 이전의 동북아에 있었다는 사회모델, 호혜와 재분배가 교환질서의 시장과 상보적으로 공존했었다는 어떤 재야연구자의 주장이 있다. 과연 현대에는 이와 같은 상보적 사회가 창조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 따뜻한 경제, 도덕경제, 호혜와 재분배와 포트레치따위 원시질서의 현대적 재현이 가능할 수 있는 여백과 틀은 어디에 있는가?
지역이다. 지역 혹은 지방이야말로 대도시집중적 시장질서의 바깥에 버려진채로 남아 우리의 새로운 삶의 운동, 삶의 경제, 생명경제, 생명과정의 새로운 통합운동을 기다리는 천혜의 여백이다. 지역은 농촌을 포함하지만 농촌만이 아니다. 수많은 소도시들과 대도시의 수많은 분산된 새 생활블록들, 새 핵들을 다 끌어안는 개념이다. 이 지역에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경제생활, 지역내발적 에너지를 축으로 하면서 새로운 지구화·세계화 추세에 대응하여 자립하려는 지역공동체적 경제생활을 건설하는 것. 잃어버리고 해체·붕괴된 생명과정을 창조적으로 현실에 맞게 재통합하는 것. 노동 신용 토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탈상품화함으로써 소외, 경쟁, 환경파괴라는 광범위한 「죽임」을 극복하여 자기실현, 사회적 신뢰, 환경회복이라는 드넓은 「살림」을 실현하는 것. 이것은 지역의 주민자치강화와 지역자립의 강화로부터 가능할 것이다. 지역의 열린 공동체가 시도하는 이같은 삶의 경제는 수많은 수용자·생활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것이며 유연한 시장의 틈을 뚫고 들어가 끊임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시장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상보적이고도 창조적인 관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물론 역으로 시장질서는 공동체 내부까지도, 가정안에까지도 침투할 것이며 공동체의 영성과 도덕성마저 상품화하려 할 것이다. 공동체는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품화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영성마저 상품화하려고 할 때, 그 때가 바로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이기를 그만두는 때이며 시장에 큰 틈이 열려 돌연변이를 일으킬 때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따뜻한 삶, 생명가치를 지향하는 영성, 생명가치와 경제가치를 공생시키려는 역설적인 상보적 관계에 대한 생활자로서의 주민·시민의 끊임없는 살림운동을 지역에서 세계로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생명운동에 대한 대중적 영적 갈증이 핵심문제로 떠오를 것이며 대중의 정신적 항체가 확산 심화될 것이다.
시장의 성화. 이 꿈결같은 명제를 화두로 하여 새로운 「생명경제학」이 탄생되어야 한다. 생명경제학이 탄생하여 대중적 차원에서 읽히고 실천되며 온갖 문화와 상상력에 기폭을 일으키기 시작할 때, 그때가 우리의 새로운 연대의 삶이 시작되는 때요, 장바닥에 비단이 깔리는 때, 개벽의 때요, 새 문명의 먼동이 동북아시아에 터오는 때일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이 단순한 민족재결합이 아닌 이상사회 실현의 차원이 되는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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