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전 제주 파견관 최부 표류중 첫 상륙지/조선 성종때 중국풍속 기록… 본보기자 답사 취재/일행 42명과 구사일생의 “처절한 여정”/영파부시장 “발자취 찾아 기념비 세울 계획” 「표해록」은 조선 성종때 문신 금남 최부(1454∼1504)의 표류기이다. 그는 제주에서 경차관(범죄자 색출관리)으로 근무하던 1488년 정월초 부친상 소식을 듣고 나주로 귀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일행 42명과 함께 표류하게 됐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 절강성에 상륙한 뒤 귀국할 때까지 1백36일간 8천여리 여정에서 겪은 경험을 일기체 형식으로 쓴 기행문이 표해록이다. 금남의 후손들은 6월 2일부터 12일까지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 녕파 소주 항주 북경 등을 답사했다. 5백6년만에 이루어진 이번 탐방여행에 본사 기자가 동행 취재, 두차례에 나눠 연재한다.【편집자주】
영파시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초여름의 따가운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주산군도를 거느린 영파는 절강성의 중심 항구이자 유사이래 해상교통의 요지이다. 은빛 파도가 잔잔하게 물결치는 망망대해가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한다. 금남 최부가 조선인으로서는 아마도 최초로 이 해변에 발을 내디딘지 5세기만에 그의 후손들이 여기에 섰다. 금남은 이 해변에 상륙해서 비로소 「삶의 희망」을 다시 갖게 되었고 후손들은 그래서 초행길 영파가 전혀 낯설지만은 않다.
89년 표해록을 「금남선생 표해록」이란 제목으로 우리말로 옮긴 17대후손 최기홍옹(76)은 『선조가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났던 고장을 5백년만에 찾았지만 전혀 낯선 생각이 안든다. 표해록에 담긴 선조의 숨결과 체취가 배어있는 듯하다』고 감격해했다. 「표해록여행단」은 최옹을 비롯한 금남의 후손 9명을 포함해 모두 28명. 이들의 감회 역시 최옹과 마찬가지였다.
부친상의 비보를 전해들은 금남이 폭풍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고향 나주를 향해 출발한 때는 음력 정월 초사흘, 한 겨울이었다. 제주포구를 떠난지 하루만에 금남 일행이 탄 작은 배는 광풍에 휩싸였다. 살을 에이는 바닷바람을 뚫고 빗물과 오줌을 받아 마시며 8일만에 도착한 곳이 바로 오늘날의 영파시이다. 제주에서 직선거리로 7백여, 비행기로는 1시간 거리이다.
금남일행은 상륙하자 마자 도적떼에게 양식과 입은 옷마저 모두 빼앗기고 작두로 목이 잘릴뻔한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간신히 탈출한 금남 일행은 다시 남쪽으로 3일간을 표류하여 태주부 림해에 이르렀다. 그들은 당시 출몰이 빈번하던 왜구로 오인받아 지방 방위소인 해문위 간부에 끌려 도저소로 압송됐다. 거기서 지방 방위 총사령관인 비왜파총관으로부터 4일간에 걸쳐 철저한 신문을 받고 또다시 처음 중국 땅에 상륙한 녕파부로 이송됐다.
영파는 7천년동안 중국의 대외무역의 전진기지나 다름없는 항구이다. 국제무역도시로서의 옛 영화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오히려 한국등 전세계 40여개국과의 국제교역 항구로 번창을 거듭하고 있다. 금남의 후손들은 항주에서 기차로 4시간만에 여기에 도착했다. 조상이 남긴 발자취를 찾아가는 그들에게 4시간의 여정은 너무도 길게 느껴져보였다.
「해정칙파영」, 즉 바다의 파도가 평안해지기를 바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그 포구에 금남일행이 탄 배가 침몰직전에 도착한 것은 전혀 우연만은 아닐성싶다.
여행단을 안내한 영파시 사건방부시장은 『녕파시는 여객과 화물운송량이 중국에서 세번째를 차지한다. 신항구인 진해·북륜작업구를 중심으로 5백∼10만톤급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이 40여곳이며, 총 3천 4백만톤 규모를 통과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랑했다.
봉화강, 용강, 여조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이 지역을 금남은 가마와 나룻배를 타고 통과하는데, 표해록에 기록된 김종포, 남도포, 광제교, 상포교, 사명산 등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당나라 시인이자 서예가인 하지장이 젊었을 때 살던 곳으로 기록된 하비감사와 그가 후에 세웠던 사찰「도관」이 81년 12월부터 시문물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금남이 배를 타고 지나치면서 기록했던 곳으로 그 명칭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있던 혜정교와 사직단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개발되면서 사라지고 기념비만 남아 있다.
사부시장은 『녕파는 신라시대 이후 한반도와 활발한 교역을 가져왔던 도시로서 금남선생이 거쳐갔다고 하니 더욱 뜻깊다. 앞으로 금남이 지나간 지역을 찾아내 기념비를 세울 것이며, 금남의 고향도시인 나주시와 자매결연을 맺을 계획이다』고 말했다. 현재 영파에는 한국인이 경여한는 세한견직 유한공사가 92년부터 진출하여 현지에 공장을 세우고 세계 각국에 섬유제품을 수출하고 있다.【영파(중국)=최진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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