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본사제정 제21회 「한국보훈대상」영광 얼굴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본사제정 제21회 「한국보훈대상」영광 얼굴들

입력
1994.06.16 00:00
0 0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한국일보사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하는 제21회 한국보훈대상 시상식이 16일 상오11시30분 본사 12층 강당에서 개최된다. 각 부문별 수상자는 ▲상이군경부문 이상로씨(65·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649) ▲미망인부문 이귀임씨(64·서울 마포구 용강동76의4)와 정진애씨(67·충남 당진군 정미면 덕삼리150) ▲유족·유자녀부문 김롱경씨(46·대전 대덕구 상서동 대창아파트9동304호) ▲중상이배우자부문 김정옥씨(60·대구 달서구 월성동84 주공아파트104동507)등 5명이다. 상패와 함께 각각 3백50만원의 부상이 수여되는 이들 삶의 면면을 살펴 본다.【편집자주】◎이상노씨 (상이군경부문)/다리관통 상처딛고 지역사회 “등불”로

 6·25가 터져 국군이 밀리고 밀린 끝에 전열을 재정비하던 50년 9월 이씨는 포항지구전투에 참가해 마지막 사투를 벌이다 우대퇴 상단부에 관통골절상을 입고 이듬해 5월 육군하사로 명예제대했다.

 이씨는 그후 고향인 전남 담양군 대전면 면의회의장과 대전면장을 거쳐 현재는 담양군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지역발전사업에 앞장서왔다. 이씨는 특히 집없는 고아들에게는 「아버지」로서, 외로운 인민군포로 출신에게는 「친형제」로서의 역할을 자처해온 지역사회의 「등불」로 평가되고 있다.

 인민군에 의해 부상한 이씨였지만 54년 5월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오갈데 없는 인민군출신의 이응균씨(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를 만나자 즉시 집으로 데려와 의형제를 맺은 뒤 호적을 만들어 주는등 10여년을 뒷바라지해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이씨는 또 68년 4월에는 당시 13세의 집없는 고아였던 이상훈씨(서울 동작구 상도동)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로 입적시킨 뒤 친자식 이상으로 잘 교육시켜 지금은 1남1녀를 둔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시켰다.

 대전면장으로 근무하던 74년 2월 이씨는 인재양성에 관심있는 독지가들과 함께 장학회를 설립, 형편이 어려운 1백21명의 학생에게 6백16만원의 학비와 입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이씨는 때마다 주위의 불우이웃들을 찾아 다니며 음식이나 옷가지등을 선물하기도 하고 경지정리나 도로확장, 환경개선사업등에 앞장서왔다.

◎이귀임씨 (미망인부문)/남편이 남긴 땅 시장으로 일궈… 지역봉사 앞장

 남편인 고이현진일병이 51년5월18일 강원 금화지구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이씨에게 남은 것은 생후 6개월 된 아들(이기성·45·외환은행 문래동지점차장)과 시부모, 시조모등 8명의 식구, 그리고 6백여평의 밭이 전부였다.

 머리에 채소를 이고 등에는 아들을 업은 채 신수동서 남대문시장까지 먼길을 걸어다니며 장사를 하느라 입술과 발이 부르트고 코피를 쏟아야 했다. 밤이면 삯바느질을 했고 장사가 없는 날이면 남의집 허드렛일을 하는등 온갖 。은일을 다 했다.

 시부모의 재혼 권유마저 뿌리친 채 64년 태평양화학에 취직해 근무하던 이씨는 70년초 소유중이던 밭일대의 개발사업에 착안, 시장을 조성키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땅이 서류 조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명의변경된 사실을 알았다. 2년여의 우여곡절끝에 땅을 도로 찾은 뒤 은행대출을 받아 지금의 마포 신수시장을 만들었다.

 이씨는 시장개설과 함께 영세상인 11명에게는 보증금없이 가게를 빌려주었다. 20명의 상인에게는 시장을 담보로 1인당 50만원씩 융자를 받아 신용대출해주는 등 신뢰를 구축, 현재는 자산 20억원에 연간 수익 1억2천만원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생활형편이 좋아지자 이씨는 지역사회개발과 불우이웃돕기에 본격적으로 나서 각종 봉사단체와 소년·소녀가장등에게 성금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히 키운 아들 기성씨가 첫월급을 받던 날은 국립묘지의 남편묘소를 찾아 두 모자가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김농경씨 (유족·유자녀부문)/직장생활 모범… 퇴근후 이웃돕기 솔선

 대전철도차량정비창에 근무하는 김씨는 불행했던 과거를 딛고 봉사활동에 앞장서는 의지의 유자녀다.

 김씨는 경찰이던 아버지(김유현)가 6·25 때 총살당하자 온 가족이 뿔뿔이 헤어져 3살 때부터 고아아닌 고아로 자라왔다. 구두통을 메고 길거리를 헤매던 그는 12세 무렵 구두를 닦고도 돈을 주지 않는 청년과 싸우다가 그 청년이 삼촌임을 알게 되고 어머니까지 만날 수 있었다. 뒤늦게 자신이 유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당시 원호청의 알선으로 인천공작창에 취직을 했다.

 김씨는 10여년전부터 퇴근 뒤나 휴일이면 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정과 노인정등을 찾아가 막힌 하수구를 뚫어 주고 보일러를 고쳐 주면서 남을 돕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제대로 모셔보지 못했던 어린시절 자신의 가슴에 맺혔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적은 봉급을 쪼개 93년 3월부터 매달 20여만원씩을 신탄진국민학교에 보내고 있다. 점심도시락조차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다. 그는 또 동료들과 함께 부모없이 할머니가 손자들을 키우는 세 가정에 달마다 5만여원씩과 학용품등을 보태주고 있다.

 직장에서도 10여회의 표창을 받을 정도로 모범적인 김씨는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이 여생의 꿈이다. 전쟁의 참화로 국민학교마저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쓰라린 과거 때문이다.

◎정진애씨 (미망인부문)/6·25때 육사사기 남편잃고 24년 시어머니 병수발

 육사1기생이던 자랑스런 남편 이준화씨(6·25당시 수도사단 OO부대장)는 휴전을 불과 2주일 남겨둔 53년7월14일 강원 금화지구전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다 전사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정씨는 시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치기로 하고 슬픔을 삭였다. 정씨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 4천여평이 토지분배정책에 따라 소작인들에게 모두 분배돼 버리는 시련을 겪은 끝에 겨우 논7백평을 마련, 시어머니와 자식을 봉양할 수 있었다.

 정씨는 화병을 얻은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끼니를 수발하는 생활을 24년여 동안 해오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새마을운동과 불우이웃 돕기, 국군장병 위문 등의 봉사활동을 계속해 왔다. 60년 부모가 교통사고로 숨져 고아가 된 같은 마을의 임계순씨(당시 8세)를 친딸처럼 키웠으며 외아들 이응칠씨(46·금성콘트롤 전무이사)를 줄곧 우등생으로 성장시켰다.

 75년부터 이미 새마을부녀지도자로 활동해온 정씨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79년부터 더욱 열성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절미운동을 벌여 모은 80여만원으로 수차례 마을 노인들을 상대로 위안잔치를 벌인 것을 비롯해 자신의 임야 4백여평을 새마을사업을 위해 선뜻 쾌척하기도 했다. 

 87년에는 아들 이씨가 내놓은 1백40만원으로 마을 노인 40명에게 효도관광을 시켜주기도 했고 88년부터는 부녀회장으로서 소년소녀가장 6세대에 지금까지 50여만원의 생활필수품을 지급해 왔다.

◎김정옥씨 (중상이배우자부문)/남편간호등 온갖 고생속 시부모봉양 극진

 김씨는 결혼 9개월만에 육군하사관으로 근무하던 남편(김윤태)이 지뢰폭발사고로 중상을 입어 생활력을 잃었으나 억척같이 가정을 이끌어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들을 하나같이 훌륭하게 키워내 주위의 칭송을 받아 왔다.

 오랜 투병끝에 58년 제대했던 남편이 대구전매청에 취업했으나 도저히 일을 감당할 수 없어 2개월만에 퇴직했다. 그때부터 김씨는 아동복 행상, 홀치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했다. 특히 양계 양토 양봉 등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꾸려나가기 힘든 사업을 벌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지만 김씨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오물처리 달걀판매 접종 먹이공급 털깎기 벌통관리 등 모든 일을 가난을 이기려는 의지 하나로 버텨냈던 것이다.

 몸이 불편한 남편 간호와 경제자립을 위한 고생속에서도 김씨는 시부모를  극진하게 모셨다. 폐결핵에 걸린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7년간이나 손수 병간호를 했으며 89세인 시어머니가 3년째 치매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모든 수발을 들고 있다.

 김씨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 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하고있다. 장남(기홍)은 경북대를 나온 뒤 대한펄프에 근무하고 있으며 차남(주홍)은 경북산업대를 나와 경찰로 근무중이다. 특히 대구대 물리치료과를 졸업한 외딸(자홍)은 대구보훈병원에서 실습중으로 앞으로 아버지와 같은 국가유공자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