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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의 현판」전 30일까지 예술의 전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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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의 현판」전 30일까지 예술의 전당서

입력
1994.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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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현판 백51점 선뵌다/영친왕이 여섯살때 쓴 「수진지만」 등 전시 조선시대 궁궐이나 주요 건물의 문과 벽등에 걸려 있던 현판들을 모은 「고궁의 현판」전이 30일까지 예술의 전당 서예관(580―1514)에서 열리고 있다.

 예술의 전당이 서울정도 6백주년 행사의 하나로 개최하는 전시회에는 덕수궁의 정문이었던 「대안문」 현판등 1백51점의 현판이 선보인다. 그동안 건물이 헐리거나 다른 이름으로 바뀌면서 자리를 잃고 창덕궁 의풍각에 파묻혀 있던 이 현판들은 선조가 주희의 시를 쓴 16세기 현판으로부터 영친왕이 여섯 살 때(1902년) 쓴 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 가운데 몇몇 현판들은 특히 기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광무 10년(1906년) 도참설을 믿은 광무제(고종)의 지시로 「대한문」에 자리를 내준 「대안문」 현판은 억울한 사연을 지닌 현판들 가운데 하나다. 이 현판은 또 일제의 간악한 침탈에 맞서 고군분투했던 광무제가 국운회복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보여주는 현판이기도 하다.

 매천야록은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안동 신양면에 도읍을 옮기면 국운이 창성할 것이라는 전 비서승 유시만이 밀진한 도참설을 믿고 광무 10년에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또 일본에 인질로 가는 수모를 겪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써 덕수궁 자신의 서실에 걸었던 「수진지만」(본진을 지키면 뜻이 만족하다) 현판도 눈길을 끈다.

 이밖에도 1896년 독립협회가 서대문 서북쪽에 있던 모화관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면서 자리를 잃었던 모화관 정문 「영은문」 현판, 숙종이 「중용의 도」를 강조하며 직접 써서 창경궁 취운정에 걸었던 「윤집궐중」(진실로 중용의 도를 지키라) 현판등도 전시된다.【서사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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