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시작후 감격 30여년/91년 미아찾기로 이어져/6,500여명 성장고아 직업주선도 「춘추필법」의 정신으로 40년을 달려온 한국일보는 창간일인 9일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고「제2의 창간」을 다짐한다.
전쟁의 포연이 멈춘지 1년뒤에 창간된 한국일보는 56년부터 30여년간 전쟁고아돕기와 이산가족재회를 위한 각종 캠페인을 펼치면서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해왔다.
창간 2년만인 56년 12월13일 한국일보는 「추위에 떨고 있는 가련한 전재고아들의 겨우살이를 도와줍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이산가족돕기 및 찾기」의 첫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달여동안 모은 독자들의 정성어린 기금으로 서울시 49개 공립후생기관 민영보육원 걸인수용소등에서 추위와 허기에 떨던 부모잃은 어린이들에게 따뜻한 동포애를 전달했다.
한국일보가 본격적으로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시작한 것은 61년 1월1일. 신년호 조간 1면에 부모 잃은 소년·소녀 63명의 인적사항을 얼굴사진과 함께 내보내면서 「10만 어린이 부모찾아주기운동」의 닻을 올렸다. 다음날 바로 감격적인 남매의 첫 재회가 이루어졌다. 구세군 서울후생학원에 4년째 수용돼있던 우종철군(당시12세)이 한국일보를 보고 달려온 누나 종숙양(19)을 만난 것이다.
어릴때 부모를 잃고 형마저 입대하자 고아아닌 고아가 되었던 종철군은 결국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1·4후퇴때 부모를 잃고 서울 혜명보육원에서 살고있던 권정숙양(19)은 11년만에 고모할머니를 만나 고향 강원 철원군의 땅 10만여평을 상속받기도 했다.
64년 7월4일까지 3년6개월간 계속된 이 운동은 66년 1월1일부터 68년까지 재개된 2차운동까지 포함해 6천1백82명의 명단을 게재,3백50건의 전쟁고아 부모상봉이란 결실을 맺었다.
「10만 어린이 부모찾아주기운동」에 이어 「부모 형제 친족을 찾아주자」는 운동(68년11월∼74년6월)을 전개, 24명이 꿈에 그리던 가족을 찾았다.
74년1월18일부터는 본격적으로「1천만 이산가족, 친지찾기운동」이 시작됐다. 76년 3월12일까지 계속된 이 캠페인에는 3천5백10건이 지면에 소개돼 1백64건의 가족상봉이 실현됐다.
보도 5일만인 설날 아침 24년만의 부녀상봉이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산가족찾기운동은 한국방송공사(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83년6월∼11월)으로 이어져 온겨레의 심금을 울렸다.
창간이래 「사랑의 연차사업」을 꾸준히 펴온 한국일보는 이산가족찾기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성장고아들에 직장찾아주기」운동(77∼81년)을 펴 6천5백33명의 성장고아들이 직장을 갖게 해주었다. 또 경제성장과 함께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된 미아들을 가족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잃어버린 아이 찾아주기」 범국민캠페인(89년8월∼90년7월)광고를 게재했고, 91년 5월에는 한국어린이재단 서울시경과 함께 「집잃은 아이를 가족품에」 미아찾기 범국민 캠페인도 전개했다.
창간40주년을 맞아 「젊은 신문」 「녹색사회」 「대문화한국」을 표방한 한국일보사는 앞으로도 우리사회의 소외계층을 찾아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할 것이다.【권혁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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