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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이종철기자 「엘가지역」가다(시베리아 벌목장:10·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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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이종철기자 「엘가지역」가다(시베리아 벌목장:10·끝)

입력
1994.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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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 북 노동자에 “고개 절레”/“목재공장 떠나면서 폐허로 만들었다” 화살/“민가의 개·닭·옷 등 훔쳐가” 당국에 추방요구/“밥한그릇·나물하나먹고 중노동하니…” 동정도 시베리아의 북한 벌목노동자들이 떠난 곳에는 뒷말이 많이 남아 있다. 북한 벌목노동자가 부득이 철수해야만 했던 벌목장에는 러시아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만의 목소리」가 아직도 폐허속에 남아 있었다.

 지난 5월 20일 취재팀은 비로비잔목재가공공장을 찾았다. 지난해 11월까지 북한과 러시아는 합작으로 이곳에서 벌채한 원목을 가공, 각목이나 합판등 1차 가공품은 물론 옷장, 침대등 목재가구를 생산해왔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서쪽으로 약 80떨어진 비로비잔은 러시아내에서 유태인이 가장 많이 몰려사는 유태인자치구역.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군 포로수용소로, 최근까지는 악명높은 북한임업대표부 구류장이 있었던 곳이다.

○“철수 아니라 추방”

 취재팀이 찾았을 때 비로비잔목재가공공장은 목재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러시아인 노동자 몇사람이 원목을 자르고 있는 허름한 공장 한곳을 제외하면 허물어진 건물벽과 구멍이 뚫린 천장, 바닥에 널린 쓰레기들, 그리고 녹슨채 잠자고 있는 거대한 기계와 장비들,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폐허와 다름없었다. 최신 설비를 갖추고 원목가공 및 가구제작작업을 해왔던 시베리아 최대목재가공공장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공장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철로도 흙과 톱밥에 묻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비로비잔목재가공공장의 코발료프공장장은 북한인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공장을 한번 둘러보면 알겠지만 여기가 어디 목재가공공장이냐,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이지. 북한노동자들이 철수하면서 이렇게 만들어놓았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는 『북한측이 왜 철수했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철수한게 아니라 쫓겨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여기는 유태인 자치지역이다. 북한노동자들이 그동안 주변 민가의 개와 닭, 옷가지등을 훔쳐가고 강가에서 고기를 마구잡이로 잡는 바람에 분개한 주민들이 행정당국에 북한인들의 추방을 요구했다. 행정당국은 지난해 10월,주민들의 원성에 못이겨 북한측에 15일내 모두 철수하도록 명령했다』고 과정을 설명했다. 비로비잔 행정당국이 강제추방조치를 내렸다는 것.

 비로비잔목재가공공장 부근의 텃밭에서 만난 러시아인주부 엘레나(43)는 『북한노동자들이 여기에 얼마나 큰 이익을 안겨주었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우리는 죽을 맛이었다. 없어지는게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난 탈출벌목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그들은 『비로비잔목재가공공장은 시베리아 벌목노동자들이 당간부에게 뇌물을 주고서라도 근무하고 싶어했던 곳이다.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다 실내작업, 좋은 숙박시설등 작업조건이 벌목현장보다 월등히 낫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주변에 개 안남아”

 지난해 여름부터 비로비잔목재가공공장에서 철수한다는 말이 나돌면서 공장노동자들은 북한귀환보다는 벌목현장으로 다시 나가기 위해 당간부에게 뇌물을 주기도 했다는 것. 따라서 비로비잔 철수는 그이전부터 예정되었던 것이다.

 북한노동자들이 철수하고 난 비로비잔가공공장에는 그러나 아직도 일부간부들이 남아 뒷마무리 작업을 하고있었다. 취재팀은 코발료프공장장의 안내로 북한노동자들이 묵었던 기숙사를 돌아보다 간부 몇명과 맞닥뜨렸다. 그들은 황급히 나오던 건물로 다시 들어갔고 코발료프공장장은 괜히 말썽이 나면 안된다며 그들과의 면담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우리와 마지막 결별조건을 매듭짓기 위해 남아 있는 간부들』이라며 『그들도 곧 철수할 것』이라고 전했다.

 코발료프공장장은 공장내부와 기숙사등 주요시설을 안내하면서 계속 볼멘 소리를 했다. 그는 『공장을 정리하기 위해 그들을 2주일간 더 붙들어두었으면 정리는 커녕 공장을 완전히 망가뜨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정성들여 가꾸었던 신성한 김일성집마저 폐허로 만들어놓고 떠난 사람들에게 무엇을 더 기대하느냐』고 반문했다.

 코발료프공장장은 북한노동자들과 3년여 같이 근무한 탓으로 안녕하십니까, 밥, 김치등 한국어 몇마디를 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북한노동자들의 생활상을 물어보자 『처음 몇달동안은 일을 잘했다. 그러나 작업이 중노동이어서 매일 고기를 먹는 우리도 힘든 판에 「밥 한그릇에 김치,나물 하나」만을 먹은 사람들이 어찌 계속 버틸 수 있겠느냐. 그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공장주변에는 개가 남아남지 않았다고 흥분했다. 그는 『북한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아무리 큰 개일지라도 단 몇분만에 깨끗이 잡아먹고 뼈와 털을 쓰레기장에 묻어버리는 전문개잡이들』이라고 흥분했다.

○남기업과 합작 원해

 비로비잔목재가공공장은 북한측과 결별한뒤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코발료프공장장은 『서방측과의 합작이 여의치 않아 우선 나무젓가락, 이쑤시개, 펄프등을 생산하기위해 중국측과 합작을 추진하고있다』고 밝혔다. 취재팀이 『이렇게 거대한 공장에서 그런 사소한 물품을 만들어야 되겠느나』고 의의를 제기하자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 젓가락이라도 만들어 회사를 꾸려가야한다』고 절박한 사정을 호소하며 관심이 있는 한국기업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할 것같았다. 코발료프공장장도 그 점을 인정했다. 그는 『엄청난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는 목재가공공장으로 조건이 좋다. 최신기계만 들여오면 전기, 상하수도, 철로, 노동자숙소등이 이미 갖춰져 있고 벌목현장에서도 가깝다. 블라디보스토크나 나홋카항등 수출항도 있어 입지조건도 괜찮다』고 했다.

 비로비잔목재공장은 이제 북한과의 악몽같은 합작시절을 잊고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기업을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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