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 오늘 북경 천안문광장의 민주화시위를 주도했던 학생지도자 왕단은 얼마전 한 인터뷰에서 『그때는 민주화운동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해 정부에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시위에 그렇게 많은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리라고는 짐작못했다』고 고백했다. 북경시에는 지금 민중시위의 재발에 대비해 군경이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가 있지만 89년 봄과 같은 유혈사태가 다시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스물한살의 북경대학생이던 그의 신상에도 그동안 생각못했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다른 동지들처럼 외국에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서 버티던 그는 6·4 천안문사태 직후 체포돼 「반혁명선전·선동죄」로 징역4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작년 2월 가석방됐다. 모교에 복학하려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잡문을 팔아 생활비를 벌면서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분교의 통신강의교재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요즘은 「자유인사(FREE MAN)」라고 적힌 명함을 가지고 다니며 법 테두리 안에서의 투쟁을 다짐하고 있다.
지난달 25일자 일본 독매신문에는 「89년 민주화운동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천안문사태 5주년을 기념하는 그의 기고문이 실렸다. 이 글에서 그는 『(민주화) 운동의 주체는 시종일관 청년지식분자와 학생이었으며, 노동자와 농민은 동정과 성원을 보내주기는 했지만 결국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렀다. 학생의 동맹군이 되어야 할 중산계급이 중국에서는 아직 형성돼 있지 않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또 지식인그룹과 학생지도부의 협력이 없어 운동이 통일성을 갖추지 못한 점도 실패의 큰 원인이 됐다고 자체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사후의 수많은 비판과 분석, 가슴을 치는 후회와 한탄이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람들은 과거의 일을 거울삼아 온갖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토론과 계획과 연습을 반복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지만, 막상 일이 벌어져서는 합리와 이성에 의한 판단은 흔적이 없고, 사태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양상으로 전개되는 수가 많다. 세계사상 모든 혁명과 전쟁이 그랬다.
중국공산당지도부에는 지금 큰 걱정거리가 두 가지 있다. 민주화운동과 경제선진지역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그것이다. 두달 뒤면 90이 되는 등소평의 사후 그의 절대권위에 의지하던 당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될 때 이 억눌렸던 욕구들이 어떤 모습으로 분출할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
북한핵협상이 막바지에 다가가고 있다. 그 결과가 제발 최악의 선택이 되지 않기를 하늘에 빌 뿐이다.<편집부국장>편집부국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