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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벌목 끝내면 「외화벌이」 내몰려(시베리아 벌목장: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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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벌목 끝내면 「외화벌이」 내몰려(시베리아 벌목장:6)

입력
1994.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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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값 품팔고 「사업소」 상납/교포들 “북한인 죽기살기 장사… 많이 번다”/마을내려와 밭·건축일… 보따리 장사도/대도시선 “탈출자색출” 안전원단속 곤욕/이진희·이종철기자 「엘가지역」 가다 북한 벌목장과 인접해 있는 체그도민이나 티르마, 엘가등에는 먹을것과 일거리를 찾아 러시아인 마을을 배회하는 벌목노동자들이 많다. 이들은 겨울철 벌목작업이 거의 끝나고 인원교체가 시작되는 4∼5월에 집중적으로 산(벌목현장)에서 내려온다.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 한푼이라도 더 벌기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당간부나 임업사업소측에 의해 내몰리고 있음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혹독한 작업환경속에서 겨울철 벌목작업을 끝낸 노동자들이 또다시 고생스런 「외화벌이」에 내몰리는 것이다.

 취재팀이 벌목현장 잠입취재를 마치고 체쿤다마을을 떠나던 날인 25일 상오7시, 벌목작업장과 통하는 마을 앞 큰길에서 원목 운반용인 대형 트레일러가 잠시 정차, 트레일러 뒤쪽에 타고 있던 10여명의 노동자 가운데 4명을 내려준뒤 떠나는것이 목격됐다. 남루한 옷차림의 북한노동자들은 담배를 피워물며 뭔가를 잠시 숙의하는듯 했다.

○일당 4천루블선

 대형트레일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것을 확인한뒤 취재팀은 사향노루나 웅담등을 구하러 온 장사꾼을 위장하며 접근했다. 경계의 눈초리가 조금 수그러들 즈음, 『이렇게 일찍 웬일이냐』는 질문에 빵떡 모자를 쓴 새까만 얼굴의 중년 사나이가 홀쭉한 배를 호들갑스럽게 두들기며 『아침을 많이 먹고 할일 없어 나왔다』며 묻지도 않은 「아침밥」얘기를 했다.

 그는 이어 『벌목현장에는 일거리가 없어 상점이나 돌아볼 겸 찾아왔다』고 말했다. 취재팀이 웃으면서 『어제 러시아인 텃밭에서 일하는 동무들을 보았는데 그 일을 계속하러 온게 아니냐』고 넘겨짚었더니 정색을 하며 『무슨 소리냐. 우리는 벌목장에서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돈을 조국으로 송금할 수있는데 뭐하러 러시아인 텃밭에서 일을 하느냐』며 서둘러 자리를 떠버렸다.

 그러나 이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금세 드러났다. 체쿤다마을의 하나뿐인 상점에는 「근무시간 상오10부터 하오5시까지」라는 안내판이 걸려있었다. 상점이 문을 열기에는 무려 3시간이나 남아 있었던 것. 아니나 다를까. 한시간쯤 뒤 두 벌목노동자가 러시아인과 함께 트랙터를 타고 「외화벌이」를 위해 일터로 떠나는 장면이 목격됐다.

 체쿤다에서 농사를 짓는 러시아인 푸슈킨씨(42)는 『4∼5월 농사철에는 겨울철 벌목작업을 끝낸 북한노동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이들은 일단 배불리 먹여 주는 것을 조건으로 흥정을 하는데 대부분 우리가 제시한 일당 4천루블(약 1천6백원)에 동의한다. 일할 곳은 적고 일할 사람은 많으니 어쩔수 없을것』이라고 말했다. 벌목노동자들이 이렇게 번 돈을 혼자 다 챙기는것은 아니다. 일정액을 임업사업소측이나 당간부에게 바쳐야 한다.

 북한노동자들은 바깥으로 내몰려 배를 채우고 싼값에 품을 팔고 있는 셈이다.

 벌목현장에서 최소한 6백∼7백 떨어진 하바로프스크등 대도시에서 외화벌이를 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이들은 벌목장 주변에서와는 달리 사회안전부 요원들의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외곽에 있는 자유시장에서 중국교포들과 함께 옷과 신발장사를 하는 한 북한인은 『한달에 20만루블(약 8만원)씩 사업소에 내야 하는데 하바로프스크의 안전원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김정일동지의 지시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다짐을 받고 나왔지만 이곳 안전원들이 그간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우리를 탈출노동자로 몰아간다』고 불평했다.

○교포 「땅집」서 합숙

 외화벌이 노동자들은 소속 사업소내 당간부의 지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도시 임업대표부 소속 안전원들은 탈출벌목공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이들마저 단속한다는 것. 그는 『안전원이 한번 올 때마다 최소한 5만루블(약2만원)은 줘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원이 거의 매주 한번 자유시장을 들른다는 중국교포의 설명대로라면 이들이 안전원에게 뜯기는 돈은 상당할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어려움은 또 있다. 하바로프스크의 임업대표부에서 나온 외화벌이노동자는 예외이지만  멀리 떨어져 일선 사업소에서 온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에 곤욕을 치러야한다. 한 외화벌이 노동자는 중국에서 온 교포보따리 장사꾼이 너무 많아 장사는 갈수록 힘들어지는데 숙식비는 자꾸 오른다고 푸념했다. 중국교포들이 이곳의 돈벌이가 쏠쏠하다는 말을 듣고 너도나도 몰려와 두어달전에 4천루블이었던 한달 숙박비가 5천루블로 올랐다. 이들은 주로 시장주변에 있는 교포의 땅집(텃밭에 달려 있는 일반가정집)에서 중국교포들과 함께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들은 또 자유시장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 하루 5천루블을 내야 한다. 이른바 자릿값이다.

 중국연변에서 온 교포 김씨는 『북한사람들은 장사를 잘한다. 대부분 죽기아니면 살기로 장사를 하고 있으며 러시아어를 어느 정도 구사해 우리들보다 많이 버는 것같다』고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에는 주택건설 현장을 찾아 품을 파는 북한인들도 많다. 이들은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집을 찾아다니며 일을 시켜줄것을 애원한다고 한다.

 북한노동자들은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현장에서 먹고 자는 고달픈 생활을 하고있었다. 취재팀은 한 주택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으로 돈을 버는 북한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하바로프스크에는 눈이 내릴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칸막이로 막은 공사판 한 곳에서 간단한 취사도구와 담요 한장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노루·들소사냥도

 외화벌이의 종류는 다양하다. 러시아당국의 단속을 피해 산림에서 사향노루나 들소사냥을 하고 들쭉을 채취해 팔기도 한다.또 일부사업소에선 배급된 백미일부를 빼돌려 밀주를 제조,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러시아인들에게 은밀히 팔기도 한다.

 외화벌이 노동자들은 최근 들어 한국산 제품이 러시아인에게 인기가 있다는 점을 알고 하바로프스크에 주재하는 한국상사 주재원들에게 접근, 노골적으로 도와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상사주재원들은 북한인들이 한국산 라면이나 음료수·초콜릿등과 여자용 의류를 싼값으로 구입, 팔고 싶어하지만 자본금이 적은데다 도와줄 입장이 되지 않아 거래를 하지 않고 있다. 벌목노동자들은 중국교포 도매업자로부터 물건을 사다가 다시 약간의 마진을 붙여 보따리 판매를 하는것 같다고 한국상사 주재원들이 귀띔했다.

 외화벌이에 나선 벌목노동자들중 수완이 좋아 그들의 계산방식으로는 「상당한 돈」을 벌어 북한에 귀환할 때 텔레비전 1대를 사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 탈출 벌목노동자가 전했다. 당간부나 사회안전부 요원들에게 상납을 잘하고 요행히 돈버는 목을 잘 잡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북한에 돌아가면 선망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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