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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TV 제작 「한국전 내막」/SBS방영 2부 지상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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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TV 제작 「한국전 내막」/SBS방영 2부 지상중계

입력
1994.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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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50년11월 전투비행던 투입/소 조종사 중공군 위장… 참전은폐/고사포 사단,미군기 1천3백9대 격추/세계대전우려 김일성에 평화회담 제한 SBS TV는 북한의 남침을 처음 인정한 러시아 국영 오스탄키노TV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 내막」 1, 2부를 2일밤 11시부터 60분간에 걸쳐 방송했다. 오스탄키노방송은 이 다큐멘터리를 5월21일 1부 방송에 이어 28일 2부를 방송할 예정이었으나 북한의 강력한 항의로 취소한바 있다. 본보 5월23일자(4면)에 게재한 1부에 이어 SBS TV가 방송한 2부내용을 요약해 지상중계한다.【편집자주】

 1950년 3월 5일. 스탈린은 무력통일을 희망하는 김일성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모스크바 별장에서 김과 비밀회동하고 남침준비에 대해 최초로 본격협의했다. 이 회동에서 김은 북한에는 7개사단이 있는데 3개사단을 늘려 10개사단으로 전쟁준비를 한다고 밝혔다. 김은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탄약과 통신장비, 탱크, 장교용군사장비등을 7월까지 지원해줄것을 요청했다. 한국전쟁은 이렇게 북한의 도발로 일어났다.

 그해 9월16일 미국은 제10군단을 인천에 상륙시키고 부산방어선에서도 강력한 공격을 펴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했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다시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고 스탈린은 중국의 모택동에게 참전을 요청, 그해 10월하순 중국인민의용군이 전선에 배치됐다.

 전쟁발발 4개월이 지나 전선이 몇개 방향으로 분할돼 신속히 이동할 무렵, 스탈린은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만약 10월말까지 미 공군에 의해 제공권이 장악되면 11월에 특수비행단을 창설키로 했다. 실제 소련 공군과 고사포부대가 전쟁에 참가한 증거는 많이 있다.

 한국전쟁에 참가, 공을 세워 51년에 영웅칭호를 받았던 세르게이 크라마렌코 전소련공군 준장은『전투에 참가한 소련군 조종사들은 참전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중국해방군 복장을 했다. 우리는 상공에서 조선말로 명령하기 위해 조선어도 배웠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서는 조선어를 모두 잊어버려 모든 무선통신은 결국 러시아어로 했다』고 증언, 소련 공군의 참전을 확인해 주었다.

 그해 11월 스탈린이 창설한 4개 사단으로 편성된 제64전투비행단과 2개전투비행사단 그리고 2개의 고사포사단, 또하나의 지원사단이 북조선 비행장에 배치됐다. 이중 일부는 중국에도 배치됐다. 

 소련의 고사포사단은 50년과 51년 초기에 1백40대를 비롯, 모두 1천3백9대의 미군기를 격추시켰다. 반면 소련군의 손실도 물론 있었다. 약간 다른 견해도 있지만 비행기는 3백51대가 격추 당했고 3백11명의 조종사가 전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5∼7대 가량정도일 것이다. 미군기의 경우 대부분 바다로 공격을 해왔다. 따라서 대부분 바다로 떨어졌다.

 당시 소련 공군들은 수시로 교체됐다. 5∼6개월마다 연대단위 혹은 편대단위로 교체되면서 새로운 부대가 오곤했다. 스탈린은 이를 통해 또 한가지의 목적을 생각하고 있었다. 즉 공군들의 군사훈련과 전투경험을 고루 쌓아보자는 것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스탈린은 점점 전쟁에 흥미를 잃어갔다. 북한이 다시 공격할 경우 미국은 원자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미국 언론계의 소문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한 정보가 수집됐고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경우 불리한 상황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졌다.

 당시 소련은 몇개의 핵무기만을 보유한 채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가려는 반면, 미국은 이미 이때 소련의 10∼15배나 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련에는 미국까지 갔다 되돌아 올 수 있는 비행기나 로켓도 없는 상태여서 핵무기로도 미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별다른 방도를 갖고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스탈린은 당시 있었던 한 정치국원들과의 모임에서『이 전쟁은 무승부로 끝날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스탈린은 이어 김일성과 만난 자리에서 처음으로『북한이 평화회담을 주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전은 20세기에 발발한 가장 치열한 국지전중의 하나였으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전쟁이기도 하다. 한국전에 대해 쓴 책은 단 한권도 소련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소련에도 총참모부가 비밀서적을 한권 출판한 적이 있지만 그 책은 전술만을 다뤘을 뿐이다. 역사적 기록을 남긴 책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적잖은 소련조종사들과 장교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제64전투비행단 소속이었던 페벨랴예프대령의 경우 무려 19대의 미군전투기를 격추시킨 것을 비롯, 소련조종사들은 많은 미군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도 올렸다. 소련조종사들이 몇차례 미군기를 해안 모래사장에 강제착륙시킨 적도 있다.

 당시로선 최신기종이었던 F86등 미전투기 몇대가 소련 수중에 들어왔다. 소련지도자들은 이것을 소련으로 갖고 오라고 명령했고, 실제로 그중 몇대는 연구소에서 연구와 견학에 사용됐다. 항공연구소에는 이 비행기들의 비행·기술자료, 엔진등이 아직 보존돼 있다.【정리=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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