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다 북 귀환 더 두렵다”/이진희·이종철기자 철통경비뚫고 「엘가」취재/「탈출」 얘기에 “처자식만 없으믄”/「새벽별 보기」에도 “돈번다” 자위 한국일보사는 6월9일의 창간 40돌을 앞두고 현대판 노예수용소로 불리는 시베리아 북한벌목현장을 한국 언론사로는 최초로 잠입 취재했다. 본사의 국제부 이진희, 사진부 이종철기자등 2명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밀착취재한 인권말살의 현장은 엘가지역에 있는 북한임업대표부 제1연합 제2사업소의 산지중대.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북서쪽으로 7백여 떨어진 이곳에 취재팀은 철통감시망을 뚫고 잠입, 5월23일부터 25일까지 이틀동안 머물며 벌목노동자들의 비참한 노예생활과 작업실태, 이들의 목을 조이는 감시체제등을 취재했다. 하루가 10년같고 감시의 눈초리가 한낮에도 추위를 더하는 북한벌목장의 실상과 긴장의 연속이었던 잠입취재과정등을 생생하게 연재, 공개한다.【편집자주】
시베리아의 북한 벌목장. 그곳은 아직도 하늘아래 가장 깊숙한 곳, 그리고 악몽으로 되살아 나는 살벌한 노예수용소였다. 하늘을 찌를듯한 원시림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그리고 곳곳의 늪지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그 한가운데가 바로 현대판 노예나 다름없는 북한 벌목노동자들의 작업현장이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북서쪽으로 6백여 떨어진 조그만 산골마을 체쿤다, 또 그곳에서 무려 1백여 깊숙이 산림 한가운데에 있는 벌목현장, 즉 엘가지역 북한임업대표부 제1연합산하 제2사업소의 「산지중대」에서 만난 깡마른 모습의 북한 벌목노동자는 탈출얘기가 나오자 마자 신음처럼 내뱉었다.
『처자식만 없으믄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디 않디요…』
20년만에 처음이라는 지난 겨울의 혹한과 굶주림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그는 벌목생활보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오히려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죽을 고생을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을 만난 순간 지난 며칠간 이곳에 잠입하기 위해 겪었던 긴장은 눈녹듯이 사라졌다. 우리말을 하는 동포가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의 고통과 한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처절한 삶의 모습, 주변의 살벌한 분위기,그리고 두려운듯한 그들의 경계의 눈빛을 보고 다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리저리 뒨굴고 있는 아름드리 원목들, 그 틈새에 떨어져 있는 해진 면장갑과 양말조각, 주인잃은 검은 운동화 한짝, 수많은 발자국들은 어려웠던 지난 겨울의 생활을 말해주는 듯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벌목장 진입로 산골마을 체쿤다에 잠입한지 하루만인 지난 24일 하오 3시께. 산속 벌목노동자들의 임시거처 주변에서 두명을 만났다.
『일을 끝내고 쉬고 계시는 중입니까』 취재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낡아빠진 양복윗도리를 걸친 사람이 한참동안 말없이 노려보다 『누구냐』고 거칠게 반문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해진 운동화 바깥으로 삐져나온 그의 엄지발가락을 보는 순간 측은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5월이라지만 아직 드문드문 잔설이 남아있는 차가운 날씨였다.
『조국에서 좋은 물건을 사러왔다가 우연히 들르게 됐다』고 둘러댔다. 그는 조국이라는 말에 놀란듯 『정말 조국이요』라고 되물었다. 이번 취재중에 만난 북한사람들은 대부분 조국이라는 말, 특히 「남쪽도 북쪽도 같은 조국」이라는 말에 경계심을 풀곤했다. 그럴땐 역시 그들도 동포였다.
성을 김이라고만 밝힌 그 노동자는 『여기 책임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요즘에는 일감이 없어 엘가로 내려갔다』고 대답했다.
그는 『땅이 풀리는 4월 중순께면 나무자르는 일은 거의 끝난다』 『5월부터 인원교체가 시작되면 겨우내 실어내고 남은 나무들을 엘가역으로 운반한다』 『지난해 11월말부터 3월까지 4개월동안은 매일 새벽 별 보기운동을 했다』는 등의 말을 했다. 주변의 나무가 대부분 잘린 것으로 보아 그들은 지난 겨울 내내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벌목작업을 했을 터였다.<3면에 계속>
◎트레일러숙소서 6명 공동생활/탈출사건 질문하자 표정 굳어져
<1면서 계속>
그러나 그곳에서 5백여 떨어진 작업현장에서 만난 두명의 벌목노동자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원목을 정리하고 있다가 취재진과 맞닥뜨리자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눈빛에는 적의감이 가득했다. 「여기가 바로 쥐도 새도 모르게 생명도 앗아간다는 공포의 북한 벌목장」이라는 걸 비로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벌목장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이곳으로 통하는 철도역, 마을, 그리고 진입로에서부터 벌목현장까지 북한안전요원들의 감시는 삼엄했다 (북한 안전요원들의 감시체제는 추후 게재).
5월들어 얼어붙었던 땅이 거의 녹으면서 도로 곳곳이 진창으로 변하거나 내려앉아 탱크와 같은 러시아제 군용트럭외에는 물리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했다.
지난 24일 상오 10시께 벌목장 어귀 체쿤다에서 취재진은 마침내 러시아인 미하일씨(가명)가 운전하는 트럭에 몸을 실었다. 긴장이 업습해왔다. 만 하루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주변의 동태를 살펴왔는데 이제 현장에 접근하는것이다.
트럭이 오르막 산길을 15정도 달렸을까, 벌목장으로 통하는 우리야강 다리위에서 북한 사회안전부요원들과 맞닥뜨렸다. 다리위는 체크 포인트였던 셈이다. 우람한 체격의 안전부요원 6명은 다리를 막고서서 「정지」신호를 보내왔다. 어떻게 할것이냐는 미하일의 눈짓에 『그냥 돌파할것』을 주문했다. 트럭은 무섭게 다리를 향해 돌진했고 안전요원들의 놀란 모습이 하얀 흙먼지 뒤로 사라졌다. 트럭안의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일행은 다시한번 긴장의 순간을 겪어야 했다. 체크 포인트에서 2시간 정도 앞을 달리고 있을때 갑자기 반대편에서 육중한 트럭 한대가 커다란 엔진소음을 내며 달려왔다. 혹시 안전부 요원들의 연락을 받고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달려온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그 트럭은 북한의 원목운반용 「제마즈」(28톤)였다. 원목을 싣고 마을로 내려가는지 제마즈 트럭은 취재진이 탄 트럭을 못본체하고 반대편으로 달렸다.
그로부터 울창한 산림사이의 외길을 트럭으로 달리길 2시간여. 「모두다 90년대 전투사업을 완성하자」 「모두다 당의 두리에 튼튼히 뭉치자」라는등의 구호가 걸려있는 산허리를 돌아서자 트레일러를 개조해 만든 산지 벌목노동자들의 임시숙소인 이른바 「빵통」이 눈에 들어왔다.
안에 사람이 있는 듯 지붕위 연통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취재진이 만난 벌목노동자중 자칭 김씨라는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엘가의 제2사업소에는 약1천여명의 벌목노동자들이 배속돼 산지중대, 도로중대, 운반중대등 분야별로 나눠 벌목작업을 한다. 그중 산지중대는 이곳외에 5∼6군데에 흩어져 「목숨을 걸고」 나무베기 작업을 한다. 이들이 먹고 자는 빵통에는 6명이 함께 생활한다고 했다. 그러나 빵통의 규모로 미루어 6명이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을것 같았다.
취재진이 두번째 만난 벌목노동자 두명은 나무를 옮기고 있었다. 멀리서 볼때 이리저리 뒨굴고 있던 원목들도 그냥 팽개쳐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두사람은 빵통주변에서 첫번째 만난 사람들보다 훨씬 말을 아꼈다. 이름(정확히 말하면 성)마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하루에 백미 8백이 제공되니 문제가 없다』고 잘라말했다. 그러나 광대뼈가 불거지고 눈이 쑥 들어간 몰골로 미루어 힘든 일에 비해 충분히 먹지 못한게 분명했다.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자 『여기서도 먹고 싶은 건 다 먹을 수 있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으나 『저 나뭇잎이 지고 새잎이 올라오면 나도 조국으로 돌아간다』며 고통스런 심정을 드러냈다.
벌목장의 5월은 보릿고개로 불린다. 대부분의 북한노동자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마을로 내려온다. 일부는 일당 4천루블(한화 1천6백원)에 감자 심는 농사일을 도와주며 얻어 먹기도 하지만 훔쳐 먹는 일이 더욱 흔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동료의 탈출사건을 묻는 질문에는 얼굴색이 변했다. 탈출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증거였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난 한 탈출벌목공의 『어캐 하갔소. 잡으러 나간 놈도 제때 돌아오지 않는 판에…』라는 비아냥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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