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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통일 논쟁의 허구성/박상섭(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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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통일 논쟁의 허구성/박상섭(한국논단)

입력
199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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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이사장이 최근 미국방문중 북한핵 및 통일문제에 관련하여 제기한 몇 가지 논점을 둘러싸고 여야간에 과민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와전과 오해로 해명됨으로써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하게 된 듯이 보인다. 여당측에서 쟁점으로 제기한 사항―예컨대 북한핵의 용인문제같은―을 보면 사실 「정답」이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시비걸기도 쉬웠지만 또한 해명도 기민하고 분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정작 중요한 문제는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위 흡수통일안에 대한 김이사장의 비판적 문제제기가 그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필자가 흡수통일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통일방안으로서 흡수통일이 주장되거나 반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기야 정부도 언젠가 흡수통일을 않겠다고 그 의지를 천명한 적이 있고 북한도 남한의 흡수통일적 자세를 격렬히 비난했던 터에 굳이 김이사장의 그러한 입장천명만이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오직 그러한 주장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또 그에 대해 별다른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통일문제에 관련하여, 특히 「흡수통일」에 대해 오해가 상당히 뿌리깊게, 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이 점을 다시 논의해 보고 싶은 것이다.

 흡수통일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독일통일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독일통일의 과정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가 없다. 다만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이 서독의 정책의지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동독의 자체붕괴의 결과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남한이 통일방안으로서 북한을 흡수하겠다는 주장이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북한이 건재하는한, 모두 문제로 성립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해답일 뿐이고 따라서 그 엇갈리는 주장들 사이의 논쟁은 원천적으로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에 관련된 논쟁이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논지는 북한이 건재할 것이라는 단서 위에서 성립된다. 그런데 최근 벌목공탈출에서 인도에 대한 식량원조요청등에 이르기까지 북한경제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여러가지 사태들을 근거로 북한이 얼마나 오래 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짙은 의문이 야기되고 있다. 핵사찰을 둘러싼 갈등에서 잘 보이듯이, 북한당국은 대외적으로 완고한 자세를 완화하기는 커녕 더욱 강화하고 있는데 이 점은 그러한 어려움이 결과할 대내적 불만을 무마·억압하고 또 다른 어떤 돌파구를 찾기 위한 고육지책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의 근본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만이 유독 붕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요인, 즉 일체의 변화와 발전을 부인한채 사회를 완벽하게 장악·통제할 수 있는 비대한 국가권력의 존재이다. 더욱이 이 권력이 김일성이라는 특정 개인에 대한 무류성의 신화화를 바탕으로 공고화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개명을 수반하는 변화와 발전은 북한의 권력체제의 유지를 돕기보다는 어렵게 한다. 변화와 발전은 결과적으로 불가피하게 김일성의 위치를 흔들 수밖에 없고 그러한 한에서 발전의 노력은 처음부터 자기모순적 시도였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러한 상황은 그 정확한 시점이 언제가 될지, 또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는 몰라도 반드시 그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동안 북한체제의 유지가 대단히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붕괴과정이나 결과가 오히려 더 큰 혼란이 될 것임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만일 그 붕괴의 과정에서 남한의 개입이―아무리 은밀한 것일지라도―의심된다면 과정상에서의 혼란의 불똥이 우리 사회에로 튈 수도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의심받을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흡수통일의 제스처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은 그 용어선택이 어색해도, 대단히 옳은 것이다.

 어찌됐든 만일 북한이 스스로 붕괴할 때 결과할 북한지역에서의 무정부적 혼란만은 외면할 수 없는 사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장 우리 사회로 여파가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논의를 피하기 위해 우선 대량 인구이동 하나만 상상해도 될 것이다. 치안유지에서 난민의 의식주대책에 이르는 각종 혼란에 대비하는 정책의 수립은 싫든 좋든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흡수통일이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정황을 살필 때 물론 우리의 경우는 독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것이 뻔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과연 그 위험과 기회를 선택적으로 또는 둘다 외면할 수 있는 것인가? 흡수통일이 이상적인 통일안으로서 바람직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계기가 선택이 가능한 상태에서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경우에도 흡수통일의 문제는 통일방안에 관련된 논쟁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논쟁에 무관하게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발생할 북한의 붕괴라는 돌발사태에 만반으로 대비하는 정부의 준비태세가 절실하다.<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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