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래 이 말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사뮤엘슨교수가 「한국경제의 기적」을 설명하는 글에서 사용했던 표현이다. 한강의 기적이 있기까지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국국민의 피와 땀의 결정임을 시사한 말이다. 나는 이 멋진 경구를 남아공의 정치적 기적을 평가하는데 인용하고 싶다. 90년대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은 남아공의 백인지배가 계속 유지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문명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끝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백인 지배층이 끝까지 기득권을 지키려 할 것이고 흑인은 폭동을 통해서라도 백인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결국 흑인의 폭력적 항거와 백인의 폭력적 진압의 악순환이 언젠가는 어느 한 쪽의 힘의 우세로 결말이 나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남아공의 흑백지도자들은 우리의 통념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치적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제 만델라대통령은 새로운 남아공 대장정의 지도자로서 우뚝 섰다. 백인지배 3백42년동안 남아공의 흑인들은 1인1표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하여 끈질긴 투쟁을 해왔다. 특히 1912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창설된후 백인의 인종격리와 차별정책에 반대하고 흑인의 평등한 정치·경제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전개해왔다. 이 투쟁이 순탄했을리 없다. 아파르트헤이트로 불리는 백인의 인종차별·인권탄압정책은 전세계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분할통치나 노골적인 탄압정책도 그것이 인간존엄성에 대한 범죄인 이상 언젠가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인간의 존엄에 관한 근대적인 자각이 있은 이래 박해를 받은 자가 박해자와 싸워 전쟁과 혁명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승리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볼 때 남아공에서 만델라의 승리로 흑백차별이 종식된 것은 인류문명사의 획기적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 남아공의 기적이 우리에게 주는 강렬한 메시지는 뭐니뭐니해도 바로 그 화합의 정치이다. 우리는 남아공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 흑인대통령 만델라의 위대함에 갈채를 보냄과 동시에 전백인대통령 클레르크의 현명함에도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클레르크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백인지배체제를 유지하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가 백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가장 온건한 흑인세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90년 2월 만델라와 그의 동지들의 석방을 단행했다. 클레르크의 신호에 회답이라도 하듯 만델라는 석방되는 그날부터 화해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양보와 타협의 이니셔티브를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나누어 가진 셈이다.
만델라의 화해의 용기는 처음부터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그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집행자였던 경찰의 지시를 따르도록 호소하는가 하면 총선을 거부해왔던 줄루족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결국 선거참여를 이끌어냈다. 집권국민당과 협력하여 만든 헌법에는 백인과 다른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만델라는 흑인의석의 감소를 가져오는 비례대표제를 과감히 채용함으로써 백인의 포용을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정치의 과정에는 타협이 있게 마련이고 이 타협이야말로 통합에로의 기술(ART TO INTEGRATION)이다. 칼 슈미트처럼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대립관계로 파악하더라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적의 적이 동지가 되는 예도 적지 않다.
이처럼 정치를 천사와 악마의 대결로 보더라도 그 속에는 타협의 여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정치적 사고의 속성이다. 그러나 실제로 동서고금의 정치사는 지배자가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과 박해받은 자가 권력을 잡은 후 정치보복을 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내는데 바로 정치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정치는 갈등과 분열을 화해와 통합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사명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동서독의 평화적 통일이나 이스라엘과 PLO의 화해와 함께 오늘의 남아공의 경우를 큰 정치의 좋은 본보기로 삼고 있지 않는가. 특히 체제측의 양보와 반체제측의 관용으로 이루어낸 남아공의 화합의 정치는 타협이 무원칙적 변절로 타락하거나 원칙이 내실없는 명분으로 질주하기 쉬운 우리의 정치문화에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자 이제 동서냉전의 마지막 유산이요, 아직도 잠재적 전쟁지역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될 남북한의 지도자는 인류와 역사로부터 정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노벨평화상은 이러한 값진 보상의 한 예에 불과하다. <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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