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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종군위안부”중국거주 정개화할머니/56년만에 고국땅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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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종군위안부”중국거주 정개화할머니/56년만에 고국땅 밟는다

입력
199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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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도성결교회등 주선/14살때 일군에 납치 갖은고초/이달 27일 내한… 가족상봉등 한 달래/“내나라 가고싶다” 요청 대사관 번번이 묵살… 더 고통 중국 벽지에서 망향의 노래를 되뇌는 「잊혀진 종군위안부」 정개화 할머니(69)가 꿈에도 그리던 모국에 온다. 정씨는 서울 상도성결교회(당회장 황대식목사) 신도들의 초청으로 27일 하오 대한항공기 편으로 서울에 도착한다. 해외거주 종군위안부가 모국땅을 밟는 것은 91년 태국의 노수복 할머니 이후 이번이 두번째. 11박 12일 일정으로 한국에 머무르게 될 정씨는 서울에 묵으면서 고향인 경북 감포, 유년기를 보낸 부산 등지 를 찾아 56년간 헤어졌던 친척과도 상봉할 예정이다.

 14살때 부산에서 일본군에게 납치돼 만주와 산동성, 임분 등의 일본군위안소로 끌려다니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 중부의 안휘성에 정착, 불우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정개화 할머니. 지난해 11월 한국인 유학생 박선영씨(29·남경대 역사학과 박사과정)를 만난 자리에서 고향은 「경상도 감포 정골」이고 「학도」라는 이름의 오빠와 「학배」라는 남동생이 있었다고 증언했었다. 그러나 정씨는 몇몇 가족의 이름과 옛 지명을 빼곤 한국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상태였다. 기억 자체가 부정확한데다 한국어 발음도 불확실해 고향과 가족에 대한 정씨의 회상은 확인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국방문을 추진해 온 성결교회 신도들은 몇개월간의 추적끝에 경상북도 경주군 감포읍에서 정씨의 호적등본과 생존해 있는 친척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경상북도 월성군 감포읍 전촌리 286. 호적등본에 정씨의 본적으로 돼 있는 이곳은 지금은 행정 구역상 경주군에 편입됐지만 동네 주민들은 할머니가 기억한대로 「정골」이란 이름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할머니의 유일한 친척은 고종사촌 정연홍씨(69·경북 경주군 감포읍 전촌리 439의 3)이다. 정할머니와는 동갑내기로 어릴적부터 친남매처럼 지냈다는 정연홍씨는 상도성결교회 교인이 찾아 갔을 때,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거의 혼절을 했었다고 한다. 정연홍씨는 『숙부(정시문씨)댁은 당시 우리집 옆에 있었는데 학도형, 개화, 학배와는 한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며 『여동생 개화는 열몇살 때 헤어진 뒤 소식이 끊겼는데 이제야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여한이 없다』며 기뻐했다.

 정할머니의 사연이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해 11월. 중국 남경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금릉시보(금릉시보)」는 그해 11월 중순께 안휘성 태화현의 벽지에 사는 조선 국적의 종군위안부 출신 정할머니(중국명 이천영)를 소개하는 기사를 냈다.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며 외롭게 살고 있는 할머니를 중국인 청년이 양어머니로 봉양하고 있다는 미담을 다룬 기사였다. 중국 국립남경대 역사연구소에서 중국 근현대사를 연구중인 유학생 박선영씨는 이 글을 읽고 곧바로 할머니를 찾아가 그녀가 겪은 비운의 일생을 기록,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정할머니돕기 모금운동을 벌였다.

 사업차 서울과 남경을 왕래하던 상도성결교회 김원동장로(49)는 지난해 12월 남경의 한 교회에서 우연히 박선영씨를 만나 이 모금운동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귀국 후 할머니의 모국방문을 추진해 왔다. 김씨는 그동안  북경의 한국대사관과 중국 외무부, 한국의 법무부, 보사부 등을 수십차례 오가며 고국방문을 위한 까다로운 실무절차를 협의해왔다.

 김씨는 『정할머니의 관련서류를 들고 해당부처를 찾아다닐 때마다 담당자는 「괜한 일 하고 다닌다」는 식으로 비협조로 일관, 모국방문을 성사시키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며 『정부는 이제라도 해외거주 정신대 희생자들에 대해 보다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정할머니가 한중국교 정상화 이후 북경의 한국대사관을 2∼3차례 직접 방문, 『한국에 가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담당자들이 복잡한 실무절차를 이유로 번번이 묵살했다고 전했다. 할머니가 거주하는 안휘성 태화현의 강묘촌에서 북경까지는 버스와 열차를 수차례 갈아타고 쉬지 않고 가도 사나흘은 걸리는 거리이다. 병든 노구에도 수천리길을 달려가게 한 「모국 방문의 열망」은 이제 몇몇 뜻있는 「민간인」들의 도움으로 그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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