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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반발 「사과족」점차늘어(“배고파서 왔디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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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반발 「사과족」점차늘어(“배고파서 왔디요”:4)

입력
1994.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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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 등 요구 담벼락 낙서·대자보까지/남한노래 「갑돌이…」 「당신은…」등 애창 함흥에서 혜산행 기차를 타기 20일전쯤인 2월말 시내에 괴소문이 나돌았다. 이름난 학교인 햇빛고등중학교 리귀완교장이 추방당한다는 것이었다. 햇빛고등중학교는 우리 아들인 금룡이 은룡이가 다니던 학교다.

 사회안전부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에게 알아보니 괴소문은 사실이었다. 리교장은 당비서의 아들을 평양의 인쇄대학에 추천해준 일이 있는데 그 애가 대학에서 김일성부자를 비난하며 남한정세를 얘기하다가 보위부에 체포됐고 뒤를 추적해보니 리교장의 추천사실이 드러났다. 리교장은 학생 하나 잘못 추천한 죄로 추방당해 장백산맥 산악지대의 제2채석광산 노동자로 좌천됐다. 30여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함흥 교육사업계는 물론 주민들로부터 추앙받던 사람이었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필체규명 노트검사

 체제에 반발하는 움직임은 대학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함흥 시내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담벼락이나 가로등에 낙서하는 것을 투서한다고 한다. 투서가 나면 필체감정을 위해 교양시간에 노트검사를 하느라 법석이다. 그러나 거의 잡지 못한다. 보위부 사람들도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평양 원산같은 큰 도시의 대학에서는 한 달에 두 세번은 노트검사를 한다고 들었다. 

 투서보다 대담한 삐라(대자보)도 나붙는다. 김일성대학에선 「쌀배급하라」 「이렇게 정치하려면 김부자는 물러나라」 「중국처럼 개방하자」등의 삐라사건이 났다. 주동자는 주로 강제귀국된 동구유학생이라고 한다. 도회지에서는 사과족이라는 신종 유행어가 생겼다. 겉은 붉지만 속은 희어 언제 반혁명분자로 변할지 모르는 조총련 상공인·유학생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점쟁이도 늘고 있다. 처도 탈출하기 전에 함흥에서 용하다는 노깔(할머니)로부터 점을 쳤다. 정치대학까지 나온 유물론자인 나는 물론 그때까지 점을 믿지 않았으나 처의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강냉이죽으로 연명

 이름 석자와 생년월일을 대니 세대주(남편)가 별(사회안전부의 간부 계급장)을 달았고 혜산에 있는 아버지 묘가 다 허물어졌다고 점쟁이는 말했다. 멀리 떠날 수인데 2월은 안 좋고 3월에 옮겨야 운수가 트이고 가다가 귀인을 만난다고도 했다. 결국 점쟁이 말이 맞아 떨어졌으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함흥에만도 직업적인 점쟁이가 제법됐었다. 심심풀이로 호상간에 손금을 봐주거나 주패(트럼프)로 운수보는 일도 흔해졌다. 점쟁이가 상처난 민심을 어루만져주는 사회주의. 

 얼마전 아들이 남한TV에 나가 「갑돌이와 갑순이」를 불렀을 때 서울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북한에선 서울노래가 제법 불리고 있다. 대부분 길림이나 흑룡강성 조선족을 통해 전파된 것이다. 남한 라디오방송에 나오는 노래는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노래라기 보다는 중국 조선족노래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리랑, 꿈꾸는 백마강, 황성 옛터를 나는 즐겨 불렀다. 아리랑은 술만 먹으면 집에서 하도 불러 처가 테이프를 내다버렸다. 가사바꿔 부르기가 유행인데 아리랑은 뒷부분의 「나를 버리고 가시는…」을 「저기 저산 백두산이라오 해뜨고 별이 솟네」로 부른다. 도시의 젊은이들은 「당신은 모르실거야」에서 「두 눈에 넘쳐 흐르는」을 「양 볼로 타고 내리는」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대학가에선 「휘파람」이 한때 유행했었다. 청춘남녀의 사랑을 그린 빠른 가락의 이 노래는 청소년을 자본주의에 물들게 한다는 이유로 얼마전 금지곡이 돼버렸다. 학교에서 서구식 고전음악이나 록음악 테이프를 듣다가 적발되는 고위층 자제들도 있다.

○군마다 암시장성행

 북한에는 암시장이 커지고 있다. 나도 암시장을 통해 일제 히타치 채색TV를 팔아 탈출자금을 마련했다. 암거래는 주로 장마당(농민시장)에서 이루어진다.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재앙당(중앙당은 재앙만 가져온다 하여 붙인 별명)은 도시의 구역단위와 지방의 군단위별로 1∼2군데씩 장마당을 설치했다. 여기선 주로 개인 텃밭에서 생산된 남새(채소), 가내부업으로 키운 닭 토끼, 비누 수건등 생필품이 거래된다. 요즘에는 압록강이나 황해도 곡창지대에서 가져온 쌀이나 의약품 중고가구 TV 냉동기(냉장고)등 사치외제품, 술담배를 비롯한 거래금지품목까지 높은 가격에 팔린다. 

 암거래시세는 보통 국영상점보다 5∼10배 비싸다. 한 병에 2원40전인 소주가 20원, 1천원인 자전거는 3천원정도다. 내 채색TV는 시세의 10배정도인 3만원에 팔렸다. 상품거래는 국영상점인 백화점 종합상점 직매점 리동상점에서 대부분 이루어지는데 당에서 주민소득증진과 노동의욕고취를 위해 장마당 개설을 허용했다. 장마당은 아이들 놀이터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 아들 딸도 장이 설 때마다 구경가곤 했다. 암거래가 횡행하자 매일 열리던 게 요즘엔 매월 10일에만 장이 선다. 신의주같은 국경도시에는 중국에서 넘어오는 보따리장수들이 모이는 장마당이 선다는 얘기도 들었다. 가격차이로 암시장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자 직장을 팽개치고 장사에 나서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젊은 남녀들 사이에선 연애가 늘고 있다. 나도 사실 연애결혼했다. 사회안전부 운전원으로 있을 때 친구인 당비서 운전사 집에 갔다가 그의 여동생이 마음에 들어 결국 결혼까지 했다. 요즘은 연애결혼 중매결혼이 반반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통제가 심하고 아직 남녀교제가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연애는 주로 밤에 한다. 야심한 시간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관계갖는 것을 오락행위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해방처녀(미혼모)가 양산돼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대학생은 혼전임신이 발각되면 퇴학당하는 것은 물론 추방돼 노동직장에 배치된다. 

 여성은 대개 26세는 돼야 결혼하는데 신랑 고르는 눈이 바뀌고 있다. 전에는 보위부나 사회안전부같은 권력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이 신랑감으로 가장 인기였으나 요즘은 외교관 무역회사직원 선원등 해외바람을 쐴 수 있는 직종이 인기다. 내 딸도 기쁨조에 발탁돼 별 탈없이 커나가면 무역회사직원과 결혼시키고싶었다.

○외출때도 양복강요

 서울사람들이 북한의 사진이나 TV를 보면 공원이나 유원지에 놀러 가서도 주로 양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북한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외출할 때는 양복을 입도록 김정일이 교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양복이 급속하게 확산됐다. 나도 시내 직매장에서 3백원 주고 감색 양복 한벌을 장만해 외출 때마다 입고 다녔다. 남한에 잘 알려진 카키색 인민복은 이미 70년대에 거의 사라졌다.

 남녀 구별없이 트레이닝을 많이 입기도 한다. 비교적 값싸고 활동이 편할 뿐 아니라 국영상점이나 장마당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양에선 경공업혁명을 외치고 있지만 옷감과 옷의 공급이 충분치 않아 함흥같은 지방도시나 농촌에선 값싼 국방색 옷감으로 만든 옷을 주로 입는다. 

 내 고향 함흥에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길림에 갔다온 사람이 4명 있다. 다 토대(성분)가 확실한 당이나 기관의 간부들이다. 이들을 통해 조선족 사회와 남쪽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회상구역에서는 아예 중국으로 넘어간 탈주자들의 이야기가 만발하고 있다. 도강했다가 자수해 교화소(감옥)에 갇힌 사람도 있었다. 신의주 혜산등의 국경도시에서는 압록강을 넘나드는 보따리장수가 중국에 불어닥친 개방바람을 전해준다. 서울노래가 담긴 테이프가 넘어오기도 한다. 도회지에서는 유학생과 재미·재일동포를 비롯한 해외동포와 외국관광객도 한 몫한다. 남풍(자유바람)을 실어 나르는 전령은 역시 남한라디오 방송이다. 하도 고마워 서울에 가면 방송사를 가장 먼저 가고싶었다. 탈출을 결심한 뒤 거의 매일밤 들었고 한번은 맏딸 금주에게도 들려주었다. 식량난으로 불평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남풍마저 불어오자 철옹성같은 북한사회에 갈등과 변화가 일어나고 나같은 탈출자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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