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전지역 「식량 물물교환」 장터로/8개월째 배급중단 곡물범죄 만연/피말린 탈출 체중은 되레 3㎏ 늘어/구소·동독서 원조중단… 90년부터 사태 극심 비행기안내원이 「잠시후 서울도착」을 알려줬다. 창밖으로 그토록 그리던 남조선땅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을 때 북에서의 어려웠던 지난 생활들이 하나둘 머리를 스쳐갔다. 철저하게 통제된 체제, 강제제대당한 사회안전부,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던 나날들.
3월13일 하오 7시. 우리가족 5명은 금주와 금룡이를 혜산으로 먼저 떠나 보내기에 앞서 함흥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흰 쌀 섞인 잡곡밥(강냉이밥)과 명태 2마리. 얼마만에 구경해보는 것인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식사였기에 탈출준비를 위해 일제 히타치TV를 처분한 돈으로 그럴듯하게 식단을 꾸몄다.
『조금만 참으면 이렇게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될 거다. 아버지가 너희들에게 이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다』
김치반찬에 멀건 통강냉이죽, 끓인 물에 소금과 엿을 녹여 만든 벌건 간장이 전부였던 평소의 밥상과 딴판이어서 아이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수저를 들었다.
○강냉이죽으로 연명
중앙당 차원의 식량배급이 중단된지 벌써 8개월. 당간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민들은 물물교환으로 구입한 강냉이등으로 죽을 끓여 먹으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마른 옥수수를 밤새 물에 불려 크게 만든 다음 아침에 삶아 먹고 남으면 도시락을 싸간다. 그것도 모자랄 때는 풀죽을 쑤어 먹는다. 비록 내가 사회안전부대위때보다 생활이 궁핍해지긴 했지만 생활수준은 결코 하류층에 속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정도이니 우리보다 못한 주민들의 식생활이란 정말 말할 수 없이 처참하다.
평안도와 황해도 일부 지방을 제외한 전 지역의 지난해 농사는 냉해로 인한 극심한 흉작이었고 더구나 함경도지역은 3년째 계속되는 냉해로 곡물생산량이 아주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식량이 바닥나 배급이 중단되자 북한의 전지역은 거대한 물물교환장터로 변해버렸다. 「양말 두 켤레=강냉이 두 사발」이 공인되다시피 한 교환거래가격이다. 공업이 발달한 동쪽의 주민들은 속옷·양말등을 들고 동서의 경계를 넘어 식량을 구하러 다닌다.
여행의 자유가 사실상 제한돼 있어 통행증발급이 무척 까다롭지만 식량난이 극심해지면서 『농촌에 식량얻으러 간다』 『황해도·평안도에 물물교환을 하러 간다』는 이유만 대면 즉각 여행증을 발급해 준다. 우리 가족도 식량을 가지러 간다는 통행증 덕분에 사촌누이집이 있는 혜산까지 아무 의심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식량운반」이라면 학기중이라도 며칠이고 허락을 해준다. 금룡이학급에는 언제나 3∼4개 자리가 돌아가며 비어 있다. 모두 식량구입에 동원된 것이다.
○70년대초 살기 좋아
탈출 직전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가 황해남도에 가서 많은 곡식을 구해온 적이 있었다. 차편이 없어 리어카에 속옷·양말등을 가득 싣고 친구 3명과 함께 동서의 경계를 걸어서 넘었으나 1백50를 강냉이쌀 4백㎏을 싣고 오다가 결국 3명은 탈진해 목숨을 잃었다. 또 바로 옆집의 아주머니는 허기를 못 참고 소나무껍질을 벗겨 끓여 먹다가 그만 숨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식량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내가 본 경우만해도 부지기수다.
단천시에서는 배급이 끊기자 직장인 40%가 출근을 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장마당도 제대로 안 서고 교환할 곡물량도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다. 당국에서는 함흥으로 갈 식량을 부랴부랴 그곳으로 보내 위기를 넘겼다. 식량이 고갈된 지역에 긴급배정되는 식량은 그동안 비축했던 군량미이며 이제 그나마 바닥난 상태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간장 도토리로 제조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은 살기에 별 불편이 없는 나라였다. 배급도 충분했고 물자도 싸고 또 흔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경제가 기울더니 배급이 줄고 잡곡비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주민에게 배급이란 나라 전체의 경제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다. 바로 그 잣대가 흔들려 갔다.
과거 소련과 동독이 우방으로 버티고 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식량난이 심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원이 중단된 90년 이후부터는 군·보위부·당의 직원들에게까지 배급이 제대로 안 이뤄질 정도로 심각해졌다.
부식배급도 마찬가지다. 매년 1월1일 배급해주던 간장이 보급중단됐다. 콩이 부족해 도토리로 간장을 만들어 배급했으나 지난해에는 도토리농사마저 망쳐 3월5일께 돼서야 겨우 50씩 나눠 주었다.
90년이후 식량난이 극심해져 무직자에게는 일절 배급을 하지 않자 곡물범죄가 새로운 골칫거리로 등장했고 이 여파는 사회 각층으로 퍼져나갔다. 청소년들의 곡물탈취, 군인들의 민가침입, 일본에서 온 귀국자들을 터는 강도행위는 모두 식량난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범죄가 늘어나자 당국은 92년께 「농작물에 손대는 사람은 엄벌한다」는 내용의 사회안전부포고령을 내리고 적발되면 중형에 처하고 있다.
○김일성대 비난 벽보
식량난이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는 요 몇년 사이에도 김일성의 생일인 4월15일과 김정일생일인 2월16일만큼은 배급량이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도 과거와는 다르다. 김부자 생일전 보름동안 평소의 절반도 안되는 양을 배급하다가 당일에 몰아서 주는것뿐이다. 그러고는 「위대한 수령」 운운하는것이다.
김일성종합대는 전국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학교 담이나 부근 벽에 김일성부자의 정책을 비난하는 투서형식의 벽보가 자주 붙는다. 『문호를 개방하라』 『배급을 늘리라』는 내용등의 벽보가 붙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 나가고 있다.
함흥의 경우 불고기집, 채소상점, 물고기상점등은 간판만 걸려 있을뿐 전혀 영업을 하지 않는다. 평양에서도 낮 12시에서 1시까지 식사시간에만 영업을 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렇게 식량난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자 『차라리 전쟁이나 나라. 어느 쪽이 이기든 먹을것만 해결되면 좋겠다』는 식의 자조섞인 말을 하고 있다.
당국은 식량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외화를 벌어들이는데 혈안이 돼있다. 함남지방에서는 90년에 백도라지(아편)밭을 꾸려 거액을 벌어들인것같다. 이듬해 김일성은 1주일에 한번 내리는 교시문을 통해 『함경남도는 백도라지를 많이 재배해 함남인민의 곤궁을 스스로 풀라』고 지시했다. 이후 함경남북도와 자강도·양강도지역은 백도라지재배에 열을 올려 감자밭을 백도라지밭으로 바꾸기에 이르렀다. 당국은 『감자 4톤을 수확할 수 있는 1정보에 백도라지를 심어 팔게 되면 감자 40톤을 살 수 있다』고 권장하고 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백도라지재배에 동원되고 있다. 우리 애도 수확기에 한달간 다녀온 일이 있다.
감자재배는 대부분 주민들이 관리하므로 일부는 식량으로, 일부는 생활방편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나 백도라지는 당국이 일괄적으로 관리운영하게 돼있어 결과적으로 먹을것만 줄어들게 됐다는 불평불만이 커졌다. 독일통일·소련붕괴로 동구권국가들의 원조가 끊긴 이후 서서히 줄어들다 마침내 식량배급이 중단된 지난해 8월부터 주민들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식량확보를 위한 투쟁이 시작됐고 체제에 대한 불만이 쌓여만 가고 있다.
북한땅을 벗어나 서울에 오기까지 잠 못자며 고생한 40여일의 탈출기간은 피가 마르는것같은 긴장의 나날이었지만 체중은 오히려 3㎏이나 불었다. 북에서 매일같이 멀건 죽만 먹다가 중국에서 고기와 쌀밥을 배불리 먹은 덕분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날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약속은 지켰다.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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