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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추격겁나 한국공관행 포기(“배고파서 왔디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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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추격겁나 한국공관행 포기(“배고파서 왔디요”:2)

입력
1994.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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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인 운전사」 만나 심양서 20일/감시 덜한 완행열차로 불안속 남행/비행기 옆사람 “여선생 환영”에 송곳긴장 풀려 압록강 빙판을 넘어온 뒤 처가 보이지 않자 가슴이 철렁했다. 살을 에이는 북풍도 느낄 수가 없었다.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실제론 5분도 채 안된 시간이었다. 『오마니 정신차리시라우요』 아이들중 누군가가 주위를 뒤지다 부근 나뭇가지 사이 눈 위에 실신해 쓰러져 있는 처를 발견했다. 미친듯이 인공호흡을 시키며 전신을 문질러댔다. 잠시후 기적적으로 눈을 뜬 처는 그때까지도 진정이 안된듯 앞쪽의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나뭇가지를 경비병으로 착각해 실신했던 것이다. 『아녀자의 새가슴은 어쩔 수 없구만…』 혼잣말처럼 한 내 말에 아이들은 얼핏 웃는 것 같았다.

○나무 초병착각 실신

 놀란 가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필터가 없는 4원짜리 중국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숨죽인채 30여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가족들의 심장박동소리만 들릴 뿐 주위는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시계를 보았다. 3월21일 새벽1시. 함흥서 기차를 탄지 꼬박 48시간이 지났다. 일단 금용이를 「척후병」으로 내세워 망을 보게 했다. 이번 탈출작전을 통해 금용이는 정말 믿음직스러운 맏아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젠 됐다. 무조건 멀리 달아나자』 우리는 북서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만약 걸리면 명태 팔러온 장사꾼이라고 속일 참이었다. 대략 70리쯤 될까 6시간 정도를 하염없이 걸었다. 벌써 날은 밝아 있었고 배가 고파 숲속으로 들어가 가져온 주먹밥을 나눠 먹었다.

○은룡이 넘어져 고생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철길이 있는 무송까지는 가야 하는데…』 일단 무송에 도착하면 거기서 기차를 타고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흑룡강성으로 갈 참이었다. 그래서 떠나기전 갖고 있던 조선돈을 다 털어 쌀과 기름을 사고 한 20일은 견딜만한 주먹밥을 준비했던 것 아닌가. 아침8시께가 지나면서부터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갔다. 우리는 북조선 인민들이면 누구나 입고 다니는 방한복에 옅은 밤색 바지등을 입고 있어 누군가가 약간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금방 탈북자임이 탄로날 판이었다. 그러나 도로 옆으로 한줄로 늘어서서 걷고 있던 우리 가족들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중간에 용기를 내 트럭 한대를 세웠으나 운전수가 조선말을 전혀 못했다. 또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주먹밥을 먹은후 꼬박 3시간 정도를 계속 걷고 있었다. 막내 은룡이는 다리가 완전히 풀려 자꾸만 자빠졌다. 『여보, 점쟁이 할머니가 말한 귀인이 과연 나타날까요?』 그때까지 말없이 뒤따라 오던 처가 불쑥 애처롭게 물어왔고 나는 대답대신 처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또다시 가슴에서 뜨거운 기류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하느님…』 북조선에는 제대로 된 종교가 없지만 인민들 사이에서는 몰래 성경도 보고 불경도 외우는등 저절로 신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내겐 정식 종교가 없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흐느끼듯 새어나왔다.

○다짜고짜 트럭세워

 4시간쯤 더 걸은 것 같다. 중국땅을 밟은 이래 1백40리쯤 걸은 셈이다. 하오1시30분 멀리 뒤쪽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트럭 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다짜고짜 길 한가운데로 달려들어 두 팔을 들었다. 이번에는 무조건 차를 얻어 타고 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 행운인가. 『어디까지 가십니까?』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민 운전수의 입에서 나온 것은 분명 조선말이었다. 김씨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조선족은 어딘지 모르게 처음 보는 순간부터 신뢰가 가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점쟁이가 말한 귀인이 아닐까란 생각이 스쳐갔다.

 『사정이 이러하니 무송까지만 좀 데려다 주시오』 내친김에 저간의 사정을 다 얘기하고 다짜고짜 도움을 요청했다. 김씨는 그러나 『그쪽 보다는 한국영사관이 있는 심양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고 제의했다.

 귀순후 당시를 돌이켜 보면 볼수록 이 상황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기로였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압록강을 건너는 불과 그 몇분이 첫번째 운명의 기로였다면 당초 흑룡강성으로 가려던 계획이 김씨에 의해 바뀌어져 심양으로 가게 된것이야말로 두번째 운명의 기로였다.

 김씨 트럭 화물칸에 다섯 식구의 몸을 싣자 이내 온몸이 물에 젖은 솝처럼 축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얼굴에서 탈출후 두번째 미소를 본 것도 이 순간이었다. 막내는 처와 함께 이내 곯아떨어졌고 맏아들 금룡이놈은 그때까지도 눈이 초롱초롱했다. 큰딸 금주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일단 중국에 가서 잘 살아보자며 구슬러 데려오긴 했지만 앞으로 남조선까지 함께 가자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민이 시작됐다.

 심양의 김씨네 집은 방이 두칸이라 우리 가족들은 한방에서 함께 기거했다. 가져온 짐을 풀자 배낭 속에 남아 있던 주먹밥이 나왔다. 그러자 김씨는 대뜸 『이게 무슨 인간이 먹는 밥이냐』며 그대로 쏟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참으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흰 쌀밥을 지어 내왔다. 북조선에서는 역시 속아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북첩자 3천명넘어

 드디어 3월 28일이 돼버렸다. 내 여행증의 기간이 만료되는 날이었다. 이와 동시에 특무(북한의 공안요원을 가리키는 듯함) 추격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나도 과거 사회안전원(경찰)에서 별(간부)을 달고 대위(남한의 경위 정도)까지 지내봤기 때문에 특무들의 생리나 활동범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국영사관을 찾는 계획은 자동 무산됐다. 누가 탈출하면 보위부요원들이 제일 먼저 깔리는 곳이 그곳이었다. 김씨는 서울로 갈 수 있는 다른 루트를 알아보자고 했다. 

 그렇게 김씨집에서 20여일을 지냈다. 이 기간은 「추격자」들이 무서워 창밖조차 내다볼 수 없었다. 모든 일을 하느님과 김씨에게 맡겨놓은 상태였지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괴롭고 지루한 감옥생활과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탈북자가 갈수록 늘어만가자 김일성·김정일은 지난해 말부터 흑룡강성내 조선족 여성단체들과 중국측 공안요원들에게 돈을 주면서 탈북자들을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는 소릴 분명히 들었는데 어딜 감히 나다닐 수 있었겠는가. 중국에는 이밖에도 북조선 안전보위부가 풀어놓은 첩자가 3천명은 족히 된다고 들어왔었다. 그래서 요즘들어 우리같은 탈북자들은 그전처럼 한국기업이나 목사·독지가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힘들어져 끊임없는 도피와 은신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해들었다.

 맏딸 금주에게 최종 목적지가 서울이란 얘기를 했더니 예상대로 깜짝 놀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하는 중국에서 혼자 살려면 맘대로 해라. 또 자칫하면 붙들려 죽을텐데 그래도 혼자 남겠느냐』 집요한 「교양」을 했다. 금주 또한 하루종일 라디오 앞에서 한국의 사회교육방송을 듣는가 싶더니 어느 날 『아바이, 나도 서울 갈테야요』라며 잘라 말했다.

 4월 중순 우리는 드디어 서울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디뎠다. 김씨가 소개해준 중국인 안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 말이 없었다. 사실 말해봐야 못알아들었겠지만…. 안내인을 따라 기차를 타고 무작정 남으로 간 기억밖에 없다. 「쾌특」이란 빠른 기차도 있었지만 오히려 감시가 허술한 완행을 택했다. 1주일 정도를 계속 딱딱한 의자에 앉은 채로 먹고 자고 했다.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곧 자유의 품에 안긴다는 희망 때문이었으리라.

○사선넘던 순간 아득

 기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차를 타고가기도 하고 걷기도 했다. 낮에는 주로 민가에서 자고 밤시간에 이동했다. 분명 동남아 어느 나라 같았지만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도착한 어느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탔다. 물론 중국쪽 안내인은 이미 떠난 상태였으며 비행기에서는 다른 안내인을 맞았다. 

 옆자리에 앉아서도 비행기가 이륙하고 한참이 지나도록 말 한마디 없던 안내인은 황해바다 어느 상공에서 갑자기 『여선생, 대한민국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고 말을 건넸다. 순간 송곳처럼 곤두서있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감격이 북받쳐 올랐다. 

사선을 넘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함흥의 어려웠던 기억들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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