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에 화신인수 “당대 최고갑부”/66년 흥한화섬 설립후 쇠락의 길 일제시대 민족기업을 일으켜 「백화점 왕」으로 불렸던 박흥식씨의 90평생은 파란만장했다. 17세때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고인은 20대에 당시 최대 백화점 주인이 되어 일제강점기 민족기업가로서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1903년 평남 농강에서 태어난 박씨는 용강공립학교를 나와 1920년 고향에서 자본금 5만원으로 선광인쇄소를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의 회고대로 「경쟁자도 없이 돈을 긁어모으던」 박씨는 23세때 서울로 진출, 백화점과 전국규모의 유통업,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무역업을 꿈꾸었다.
그의 꿈은 28세때 신태화씨로부터 화신상회를 인수해 화신백화점으로 키우면서 꽃을 피웠고, 그의 야망과 사업수완은 그를 단시간내 당대 최고의 갑부이자 기업인의 자리로 올려놓았다. 일제말기 화신산업과 대동흥업 화신연쇄점 대동직물 화신무역 선일직물 화신상사등 계열사를 거느려 사실상 이땅에 최초의 재벌을 일으킨 것이다. 아프리카에 양은식기, 미국에 명태, 태국에 신발을 수출해 무역상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해방이후에도 화신백화점과 화신산업 흥한방적등을 중심으로 여전히 재계의 선두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66년 비스코스를 생산하는 흥한화섬을 설립하면서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예상보다 공사비가 많이 든데다 은행의 대출마저 끊겨 부실기업주로 몰렸다. 재기를 위해 73년 전자회사 화신소니를 설립했으나 모기업인 화신백화점의 부도에 이어 화신소니도 부도를 맞았다.
이후 화신백화점 뒤에 조그만 사무실을 차려놓고 마지막 남은 재산과 58년간 살던 서울 가회동집까지 처분, 재기를 노렸으나 역부족이었다.
사업이 기우는 어려움속에서도 그가 인수한 광신학원만은 끝끝내 지켜 육영사업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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