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풀 한포기·돌 하나도 살아있는 생명/상호순환… 내가 곧 풀·꽃·새·물·흙…/물·산 해치는 것은 바로 나를 해치는것/「만물의 영장」은 우주에 대한 무한한 인간책임 상징 천지의 질서는 어김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오고 꽃이 피었다. 눈부시게 흐드러진 꽃무리 앞에서 안도한다. 저 극심한 생태파괴에도 흔들림없는 천지의 질서에 안도한다. 「침묵의 봄」은 역시 허구에 불과함을 생각하며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쉰다. 가이아(GAIA·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는 죽지 않았으며 그 위대한 생명력으로 지금도 지구의 삶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웬일일까? 차례로 피어야 할 진달래·개나리·목련·벚꽃·철쭉과 복사꽃·능금꽃이 온통 한꺼번에 피어 세상을 가득 채우니 웬일일까? 꽃과 잎이 동시에 솟아 오르니 웬일일까? 봄기온이 섭씨 30도까지 치솟으니 무슨 일일까? 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서늘하다. 절기가 뒤틀린 것이다. 예부터 선인들은 절기가 뒤틀리면 그 책임을 정치에 물었다. 우리의 정치, 우리의 환경정책은 온전한가? 세계정치에 책임을 돌릴 것이다.
○죽임의 문명 활개
우리 땅은 지구에 속하지 않는 것인가? 낙동강이 썩어간다. 식수를 마실 수 없다. 영산강이 죽어간다. 목포시민들은 분노를 넘어 이제 불길한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다. 우리의 환경정책은 온전한가? 아니 물대책은 서있기나 한가? 생수시판 허용으로 출구를 찾고 있으나 생수는 오염되지 않았단 말인가? 마실 물이 없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생명이 위태롭다.
산을 무너뜨리고 숲을 베어넘기고 땅을 파헤쳐 골프장을 만든다.
러브호텔을 짓는다, 공장을 짓는다, 개발타령이 한창이고 환경과 관련된 온갖 규제를 죄 풀어버리고 있다. 산과 숲이 파괴되면 자연생태계의 죽음은 물론 인간까지도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숨 안 쉬고도 살 사람이 있는가? 이산화탄소와 아황산가스로 이미 오염될대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병들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생명이 위태롭다.
인민생명의 보위와 치산치수는 정치의 근본이다. 이 근본이 서 있지 않다. 그러나 환경문제가 다만 정치만의 문제일까? 가치관의 문제요, 생산양식·생활양식의 문제, 문명의 문제다. 현대산업문명은 자기절멸의 문명, 「죽임」의 문명이다. 기계적 세계관, 인간중심주의, 생산력주의, 풍요중독, 소비주의, 경제가치 위주의 가치관이 중심이 되어 있는 현대산업문명이 지구의 온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죽임」의 세상이다. 「살림」의 길은 없는가?
우리의 환경의식은 이 몇년 사이에 급격히 높아지고 넓게 확산되었으며 환경운동도 매우 성장했다. 입달린 사람이면 누구나 환경을 걱정한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환경위기가 쓰레기 줄이기나 합성세제 안쓰기, 정부와 기업고발차원이나 환경공학적 대증요법의 「PPM주의」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곧 원천적인 살림의 길일까?
물론 그 현실적 책임은 정부와 기업에 있으며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합성세제를 마구 흘리는 시민들에게 있다. 그러나 경제개발과 이윤획득, 편리한 생활을 가치관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정부·기업·시민들의 보편적 의식, 그리고 화석연료와 원자력을 에너지원으로 하는 무한 생산력증강이라는 지배적 생산양식, 풍요한 소비주의를 모토로 삼고 있는 현재의 생활양식을 변경시키지 않고는 환경위기의 원천적 해결은 불가능한 것이다. 살림의 길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리우환경회의에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명제가 제안되었다. 그러나 과연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명제는 지속가능한가?
나 자신이 지금 쓰고 있는 이 환경이라는 말부터 우선 살펴보자.
자연이 환경인가? 흙과 물과 공기와 산과 동식물이 환경일 뿐인가?
환경이라는 말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기타 일체 자연과 우주생명을 들러리나 무대장치쯤으로 보는 철두철미한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다. 그것은 모든 자연생명을 물질, 죽은 물건으로 보는 사고의 결과요, 그렇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착취하고 때려부수고 오염시키고 정복해도 괜찮다는,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할 권리와 의무가 인간에게 있다는 서양인들의 편협하고 잘못된 세계관의 결과이다.
환경은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다. 참새와 다람쥐와 꽃과 풀·나무는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다. 흙과 물과 공기는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이다. 자기복제능력이 있는 유기물만이 생명이 아니라 순환하고 상호관계하며 다양하게 자기조직하는 모든 자연은 생명이라는 것이 종교만이 아니라 현대과학의 위대한 결론들이다. 그것들은 그저 살아만 있는 것인가?
그것들은 앎이 있다. 앎이 있다는 것은 크게 보아 신이 있다는 것이며 영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 일체 우주생명은 신령하다. 원시의 만유정령사상과 모든 종교사상들의 우주생명관은 현대에 있어 과학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일체 자연은 신령하기만 한 것인가? 모든 개체생명은 다양하되 서로 순환하고 서로 관계하는 전체요, 보이지 않는 불생불멸의 생성진화하는 우주생명, 자기조직하는 우주생명을 모시고 있는 무궁한 생존이다. 인간인 나는 곧 풀이요 꽃이며 참새요 다람쥐요 물이요 공기요 흙이다.
우리의 신령과 우리의 육체는 무엇으로 이루어졌고 무슨 기억과 기능을 가졌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인간은 무궁한 일체 우주생명의 상호관계와 자기조직적 생성진화과정의 산물이며 진화과정 자체다.
○욕망절제 배워야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요 여타 생명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인간이 우주진화의 맨 마지막에 핀 꽃이라는 뜻이며 일체 우주에 대해 커다란 윤리적 책임과 도덕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인간이 참새를 죽이고 물을 죽이고 산을 파헤치는 것은 인간 자신을 죽이고 파헤치는 죽임의 행위, 살해행위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생명이 생명을 먹는 것이 또한 우주생명의 질서라는 점이다. 크고 무궁한 우주생명은 먹이사슬과 같은 관계망을 통해 자기를 조직하며 생성진화한다. 그러나 생명은 자기종의 보존 이외에 커다란 여백을 생산한다. 비온 뒤에 솟아나는 숱한 풀들을 보라. 다른 생명은 그 여백에 관계함으로써 자기 먹이를 획득한다. 결코 종 자체를 착취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기 먹이를 너무 많이 취하지도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무한 착취하며 무한 파괴하여 생명을 멸종시키고 있다. 고대인들은 그 먹이를 획득하는 데에도 한계를 지켰고 욕망의 절제를 알았으며 포식할 때에도 신령한 우주생명에게 감사와 공경의 제사를 드렸다. 현대의 문명인이 고대인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다시 배워야 하며 고대인으로부터 그 생명의 세계관·가치관과 생활양식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먹이사슬의 신비한 의미와 자연의 자정능력·자생능력·여백의 질서를 성실하게 배워 오늘에 부활시켜야 한다.
환경은 환경이 아니다. 환경은 생명이다. 이제 환경에서 생명으로 우리의 말과 개념부터 바꿔야 할 때다.
○개량주의와 상보
이것은 곧 의식의 전환, 세계관의 변혁을 뜻한다. 그리고 가치관의 새로운 정립을 의미한다. 생명의 가치관·세계관이 먼저 확고해져야 철학과 과학이 변모할 것이며 정치와 경제가 변환될 것이요, 생산양식·생활양식의 전환이 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의 환경운동과 같은 이른바 환경개량주의나 시장질서의 경제가치, 그리고 첨단과학기술이 모두 다 즉시 폐기되어야 하고 우리는 곧 원시와 같은 가치관·생활양식으로 돌아가자는 생태원리주의를 지지하자는 것은 아니다.
신령하고 무궁한 생명가치를 중심에 두되 경제가치와 과학기술의 내용과 질과 방향을 생명가치를 향해 점진적으로 중심이동하자는 것이며 생명생태근본주의적 신념과 세계관을 중심에 간직하되 구체적으로는 일상적인 환경개량주의의 내용과 방향을 점차 근본적 해결방향으로 진척시켜 나가는 상보적 관계에 서자는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먼저 생명의 철학, 생명의 윤리가 확립되어야 한다. 살아있음을 산 채로 탐구하는 삶의 철학이 나타나야 할 것이며 살아 있는 일체 자연생명을 신령한 것으로 공경하는 생명윤리가 세워져야 할 것이다.
환경운동은 이제 「환경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을 과감히 시도할 때가 된 것 같다. 때가 그것을 가르친다. 이 가르침을 따를 때 가이아는 드디어 미소짓기 시작하며 뒤틀린 절기는 제 모습을 회복할 것이다. 꽃은 순서대로 피어나고 물은 살아날 것이며 산은 다시금 푸르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