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육사출신… “오자와 선봉장” 역할/뿌리깊은 대아 우월 “새긴장”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일본 법무장관이 『남경대학살은 날조된 사건』이라고 한 발언은 피해당사국인 중국 뿐만 아니라 2차대전때 일본의 침략을 당했던 아시아국가들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나가노법무장관은 마이니치(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차대전에 관한 언급중 『나는 2차대전때 중국전투에 참전, 남경사건직후 그곳에 갔었다. 그 사건은 날조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이 신문이 4일 보도했다. 그는 또 『2차대전을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침략을 목적으로 한것이 아니라 식민지해방,대동아공영권해방을 목적으로 한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가노장관의 이같은 발언은 일본의 신보수 우익정권을 지향하고 있는 신생당의 전략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일본육사출신으로 종전시 계급은 육군대위. 전후에는 자위대의 사단장, 동부방면총감을 거쳐 83년 육상막료장에 취임한 정통군인 출신이다. 86년 가네마루(금환신)전자민당부총재와의 친분으로 참의원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했다가 작년 신생당창당때 이적했다.
참의원에서 신생당과 민주개혁연합, 민사당, 일본신당등이 합친 통일회파「신록풍회」를 결성해 오자와(소택일랑)신생당대표간사의 정계개편전략에 선봉장 역할을 맡고있어 참의원 비례대표 2선이라는 미미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각때 요직에 발탁됐다.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남경을 침략할때 시민들을 무차별 살해하고 약탈과 폭력행위를 자행한 사건.
이 사건은 당시 현지에 있던 국제구제위원회의 보고로 세상에 알려졌다. 전후의 도쿄재판에서 연합국측이 이 문제를 추궁할때까지 일본에는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후 국제구제위원회의 독일인책임자가 「남경시내에서 4만2천여명이 죽고 상해에서 남경까지 일본군이 진격하면서 살해한 사람이 30만명이 된다」는 보고서를 발표,일본에서도 사실로 인식하게됐다.
이 만행은 최근엔 일본의 역사교과서에도 기재되는등 일본국민이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나가노장관이 이 시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나선 것은 오자와가 주도하고 있는 현정권의 국가관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고있다.
「오자와의 인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하타(우전자)총리도 외무장관시절 『천황이나 정부요인이 외유할때마다 과거문제에 언급해야 하는 것은 일본이 정식으로 사죄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솔직히 사죄하는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가 총리선출 직전에는 『2차대전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구미국가들의 일본포위망때문에 어쩔수 없는 전쟁이었다』라고 말을 바꾼 바 있다.
오자와는 국제공헌이란 미명하에 유엔깃발을 앞세운 자위대의 해외파견은 위헌이 아니며, 일본은 군사력을 행사할만큼 대국이 됐기때문에 개헌을 해서라도 국제적인 기여를 해야 한다는 신보수주의자.
그는 또 일본외교의 출발점이었던 대미관계를 절대시하지 않고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일본은 (군대를 가진) 보통국가로 재출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왔다.
신생당이 중심이 된 현 정권의 흐름에 대해 일본내의 식자층에서도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데 메이지(명치)대의 아사이 모토후미(천정기문)교수는 『오자와의 아시아중시정책은 과거의 대동아공영권구상과 닮은데다 아시아에 대한 뿌리깊은 우월감이 엿보인다』면서 『신보수주의자들의 정치·군사대국노선이 아시아국가들과의 긴장을 유발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도쿄=이재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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