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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의미의「개인」탄생/최인훈 신작 장편「화두」/권오룡(소설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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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의미의「개인」탄생/최인훈 신작 장편「화두」/권오룡(소설평)

입력
1994.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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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훈씨가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한 신작 장편소설인 「화두」는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 개인의 의미를 되새김해보고 이를 통해 현재 사람들이 처해 있는 모습과 입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작품이다. 20세기가 거의 저물어가고 21세기의 도래를 눈앞에 둔 오늘날의 상황을 진단하는데에 가장 흔히 동원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죽음」이라는 단어이다. 작가의 죽음, 문학의 죽음, 주체의 죽음, 인간의 죽음등 이러한 사망진단의 목록에 개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죽음이 새로운 탄생을 위한 통과제의적 절차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러한 진단들이 반드시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 여러가지 것들에 사망선고를 내린 사람들이 보다 많은 관심과 힘을 기울이고 있는 작업은 그 죽음 앞에서의 인문주의적 애도가 아니라 그 죽음 이후의 새롭고도 다채로운 탄생의 모습에 대한 현란한 조명이다.

 그러나 바깥으로부터 오는 그 눈부신 빛에 우리는 눈멀고 결국 사라져버린다. 세상의 밝음은 더이상 우리의 시력의 밝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신의 삶과 세계의 주인이라는 고전적인 인문주의의 명제는 이제 한낱 비웃음거리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밝기는 사람들 개개인을 꽁꽁 포박한채 짓누르면서도 이 짓눌림의 모습까지를 투명하게 만들어버리는 자본과 기술과 제도와, 그리고 이것들이 한데 뭉쳐 이루는 권력의 크기에 비례하게 되었다. 아니, 비례라는 용어도 적절하지 않다. 권력은 그 자체가 밝음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필자는 이러한 식의 모든 높이의 수용 방식에 어떤 조급함의 함정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나 현실과의 감각적 접촉에 대한 이론적 일치의 조급함이나 현상에 대한 설명이 곧 거래이론과 직결될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조바심에서 오는 조급함등. 여기에다 이념의 지주를 상실한후 허둥지둥 사실의 구체를 찾아나서지 않을수 없게된 90년대 한국의 인문학적 상황까지를 겹쳐놓고 보면 혼미의 폭은 한층 더 커진다.

 그러나 중요하면서도 정직한 것은 이 혼미를 정신의 알리바이로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혼미해진 정신을 정신의 상태로 지켜내려는 노력일 것이다. 추상과 관념이 그것만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 사실이 알리바이 조작의 빌미가 되어서도 안된다. 이렇게 본다면 당장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추상적 정신을 그 자체로 견뎌내며 지탱해나갈 수 있는 도덕적 끈기일 것이다.

 최인훈씨가 자신의 생애와 겹쳐진 긴 이야기를 통해 끈기있게 추구하여 찾아낸 관조적 개인의 중요한 의미는 이러한 사실과의 연관에서 찾을 수 있다.<문학평론가·한국 교원대불어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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