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중단·인허가지연등 여전/잇단유화책 안통하자 공식화/각종제재·재판관련 「상당한선처」기대 정주영현대그룹명예회장은 3일 일본 출국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현대그룹의 경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재차 확인했다. 정명예회장은 이날 회견에서 『그룹경영은 정세영회장에게 일임하고 서산농장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해 몇차례 밝혔던 경영일선 퇴진의사를 분명히 했다.
정명예회장의 경영일선퇴진 선언은 이번이 세번째다. 87년 1월 현대그룹회장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퇴진의사를 밝혔고 92년1월에는 정치참여선언과 함께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말했었다. 따라서 이날 회견이 예의 경영퇴진선언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으나 전과는 달리 서산농장, 해외체류라는 경영퇴진에 따른 대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돼 그때보다 한발짝 더 진전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이날 회견장에 나온 정명예회장의 6남 정몽준의원과 그룹 고위관계자들은 『정명예회장의 완전한 경영은퇴로 해석해 달라』고 말해 정명예회장의 은퇴에 무게를 실어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정명예회장이 회견에서『은퇴한 사람에게 은퇴란 말은 있을 수 없다』고 밝힌 것처럼 이날 회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은퇴를 공식화해놓고도 경영에 관여해왔던 정명예회장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비난도 가능하다. 그러나 정명예회장은 출국기자회견을 통해 재차 경영일선 퇴진의사를 밝혔고 그룹관계자들은 정명예회장의 완전한 경영은퇴를 강조했다. 그만큼 정명예회장의 은퇴를 공식화할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정명예회장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현대그룹의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재차 밝힌 것은 정부를 향한 선언으로 풀이된다. 정치참여라는 경제인으로서의 외도를 자인하고 공인생활을 마감하겠으니 현대그룹에 대한 제재를 풀어주도록 요청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대선이후 정명예회장이 정부를 향해 직간접적으로 밝힌 여러차례의 「항복선언」도 모자라 이번에 다시 은퇴의사를 밝힌 것이란 분석이다. 지난해 『내가 대통령이 됐으면 큰일날뻔했다. 김대통령이 당선되길 정말 잘했다』며 새 정부를 향해 확실하게 보였던 정명예회장의 낮은 자세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강력한 법적의지에 밀려 실형이 선고되고 그룹에 대한 제재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현대그룹의 판단이다.
현대그룹은 정명예회장이 정치참여를 선언한 92년부터 정부의 직간접적인 제재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융지원이 중단되고 각종 인허가도 지연돼 왔으며 특별세무조사도 받았다. 새 정부 들어서는 특히 금융지원은 물론 기업공개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과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산업개발, 현대상선, 고려산업개발 등 5개사를 기업공개키로 하고 필요한 절차를 마쳤으나 최종허가가 나지 않아 못하고 있고 이들 5개사중 중공업 등 3사의 장외등록마저 보류되고 있다. 90년 1천3백98억원, 91년 2천4백억원을 설비자금으로 산업은행으로부터 배정받았던 현대그룹은 92년 6천5백억원, 93년 8천3백20억원을 신청했으나 일체 배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명예회장의 이번 공개선언으로 현대그룹에 대한 정부의 제재는 상당수준까지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들어 현대자동차의 말레이시아 공장건설을 위한 합작투자건, 미국 맥스터사를 매입하기 위한 투자허용 등 정부의 대현대 완화분위기는 더욱 성숙될 전망이다. 현대그룹은 일부 계열사의 장외등록이나 공개, 현대자동차의 해외증권(DR)발행, 산업은행에 올해 요청한 1조5천억원의 설비자금 등이 허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심재판중인 정명예회장에 대한 법적 배려도 현대그룹이 바라는 정부의 선처다.
결국 이날 회견은 경제우선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현대그룹을 제외할 수 없는 정부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부의 선처를 겨냥한 이날 정명예회장의 기자회견은 그러나 적지않은 여운도 남기고 있다. 현대그룹 명예회장직을 그대로 고수할 것임을 분명히 했고 자문에 응할 수도 있다고 말해 다소 여운을 남긴 것이다.【이종재기자】
◎“현대제재 들어본일 없어”/정주영회장 일문일답/은퇴 오래전일… 자문엔 응하겠다/정치는 정치인이 잘하게 되어있어
―출국목적은 무엇인가.
『서산농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쌀을 일본에 팔기 위해서다. 이 문제로 친분이 있는 스미토모상사회장 등을 만날 계획이다』
―그룹경영에서는 물러나는 것인가.
『그룹경영은 정세영회장이 전담하고 나는 서산농장에만 전념할 것이다』
―완전히 은퇴한다는 뜻인가.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그런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나 그룹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는데 특별한 의미는 없다』
―아직도 명예회장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창업자이기 때문에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것뿐이다. 이름만 회장이다. 명예회장이라는 말에 구애받을 필요없다』
―그룹에서 자문을 구하면 응할 생각인가.
『해외투자나 신규투자 등에 대해 자문해 오면 오랜 경험을 살려 자문에 응하겠다. 전경련이나 대학 등에서도 자문을 요구하면 기꺼이 응하겠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직까지는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본다. 아직 처음인 만큼 결과가 나와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정부가 현대그룹에 대해 제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정부가 합리적으로 경제를 운영하고 있는만큼 각종 제재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것을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국민으로부터 경제인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정치인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안다』
―정·경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정치는 정치를 연구한 사람이 잘하게 돼 있다』
―서산농장 일은 어떻게 하고 있나.
『매일 아침 6시30분께 현지소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농사만 생각하고 있다. 귀국하는대로 서산농장이 미국농산물과 경쟁할 수 있도록 시간나는대로 1주일에 한 두 번 정도 서산농장에 내려갈 생각이다. 올해 10만가마정도를 수출하고 내년에는 20만가마로 늘리는 등 매년 쌀수출량을 늘려 나가겠다』【김병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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