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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외교/박찬식(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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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외교/박찬식(메아리)

입력
1994.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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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쁜 출근길에 무리한 끼여들기로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사람을 붙잡아 자동차 위에 손을 들고 서 있게 한다면 당장에 새치기가 훨씬 줄어들겠지만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그렇게 하는 곳은 없다. 그러나 나쁜짓을 저지른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곳은 더러 남아있다. 싱가포르가 그런 나라다. 싱가포르에 사는 18살짜리 미국 사내아이가 길가에 세워놓은 자동차에 페인트로 낙서를 하다가 붙잡혀 태형을 선고받았다. 미국인들은 이 형벌이 비인도적이니 집행돼서는 안된다고 항의하고 있지만 싱가포르 당국의 자세는 강경하다. 사회질서를 유지하자면 미국인이라고해서 예외를 인정할 수 없으며, 미국식 인권을 싱가포르 사회에 적용하려는 태도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권과 관계없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하고 형벌의 방법은 각기 그 나라가 정한 법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양식있는 미국인의 수도 늘고 있다.

 다툼이 쉽게 가라앉을 것같지 않자 클린턴 미대통령이 나섰다. 싱가포르의 옹대통령에게 태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대통령의 이 공개적인 요구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약소국의 자존심 문제가 얽혀들게 된 것이다. 싱가포르 당국으로서는 이제 집행을 연기하고 말썽이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됐다.

 부시전대통령은 클린턴대통령이 개인적인 인기에 집착하다가 실수를 저질러 일이 꼬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대통령이 진실로 그 미국아이의 인권과 미국의 위신을 무겁게 생각했다면, 떠들썩한 백악관 성명보다는 조용한 막후외교로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했어야 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시베리아 북한벌목공을 데려오는 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탈출벌목공이 망명을 신청해 와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방침이 발표돼 국민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더니, 어느 사이에 방침이 바뀌었는지 한승주외무장관이 러시아를 다녀오면서 금방이라도 탈출벌목공을 데려올 것처럼 발표부터 해버렸다. 뒤이어 러시아주재 북한공안원들이 망명을 방해하고 있다는 보도와 함께, 러시아정부로부터 제발 공개적인 발언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부가 북한에 대해 공격적인 인권외교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옳은 선택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불우한 동포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는 길은 무슨 업적홍보처럼 떠들썩한 성과발표보다는 세심한 준비와 조용한 실리외교에 있음이 자명하다.<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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