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칼럼은 92년 4월1일부터 한국일보에 실렸다. 이번이 1백35회. 92년 6월30일에 「박용배 북한칼럼집―남과 북 ―수령·지도자 그리고 북한」이란 책으로 꾸몄을 때가 57회를 연재한 때였다. 이제 이 칼럼을 끝내려고 한다. 독자에게 진실을 밝힌다. 이 칼럼은 현재 방송위원회 위원장인 김창열선배(한국일보편집국장·사장·「토요세평」필자)가 강요하다시피 쓰게 한 것이다. 김위원장을 며칠전 만나뵌 자리에서 『이제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에서 중책을 맡았으니 그쪽에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가 있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또 이 칼럼이 한국일보에 실리지 않는다고 해서 큰 탈이 날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동안 격려해주고 친구와 선배와 후배가 되어버린 몇몇 독자에게는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화두」의 작가 최인훈(4월11일자 「남과 북」), 「갑오농민전쟁」의 작가 고 박태원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꼭 계급성과 평등, 공산시각에서 봐야 하는가의 느낌을 받았다. 그건 막연한 불안같은, 확 트이지 않는 머리속 같은 것이었다.
이때 갑자기 최인훈보다 원산고등학교 2년선배인 단편 「판문점」의 작가 이호철이 떠올랐다. 최인훈은 그와 거의 같은 때 5년여 북에 살다가 50년12월초 원산에서 LST를 타고 부산으로 왔었다. 나이 차이일까 학력 차이일까, 두 사람이 남쪽에서 북쪽을 그리는 형태는 다르다.
이호철은 19세 단신으로 부산에 왔다. 최인훈은 온 가족이 함께 왔다. 그 차이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최인훈은 「낙동강」의 조명희, 「해방전후」의 이태준,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의 박태원등 카프계 작가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는 듯 하다.
이호철은 다르다. 남쪽으로 「탈향」해 그렇고 그런 자유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북내기」 보통사람들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산다. 그가 최근 책으로 펴낸 자전적 소설같은 「남풍북풍」(「일신서적」 94년4월 재출간)에는 서울에서 67년에 일어난 이북 어느 도시 고등학교 동창생들의 남에서의 집구하기를 둘러싼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북에서 내려온 「이북내기」들이 어떻게 사기꾼이 되고, 어떻게 정직하게 살고 있나등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6·25후 17년이 지난 후에도 남쪽사람들이 「이북내기」를 어찌 보는지도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77년에 쓴 것이다.
이때만 해도 그는 약간은 북과 남에 다 함께 불만이 있었던 듯 하다. 『이북 사람들이 월남하면서 몰고온 바람은 이북바람이 아니라, 개개인 사정 만큼의 반이북바람이었다. 6·25는 이 땅을 물리적으로 잿더미를 만들었지만 그 후의 17년 동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속속들이 황폐한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 쓴 칼럼들을 모은 「희망의 거처」에서 그의 필체는 날카로워지고 있다. 그는 73년 유신반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였고 74년에는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런 그가 이 책 3부 「이념과 이념정치의 현실」에서 남쪽의 급진재야, 북쪽 수령부자체제를 신랄하게 짧은 글로 비평하고 있다.
북이란 어떤 사회인가. 『온 사회를 증류수성으로 끌어가고 닦달하는 곳이다』라는 것이다. 탈향민, 이산가족 1천만 상봉에 겨우 첫 걸음이 5만분의1인 2백명이다(이것마저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독일에 있는 그의 친구는 『한반도는 어느 우주에 속해 있느냐』고 이 이야기를 듣고 평했다는 것이다.
그는 수령부자를 포함한 「증류수 제조자」들은 『30년대의 항일빨치산시절인지, 50년대 피비린내 나던 동족상잔의 시절인지 알쏭달쏭한 속에 30년대와 50년대로 시간이 정지된 상태에 있는 것 같다』고도 분석하고 있다.
이런 체험과 동구권 몰락현장을 살핀 「세기말의 사상기행」까지 마친 그가 있기에 재주가 별로없는 필자가 「남과 북」 칼럼쓰기를 멈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호철선생의 「희망의 거처」를 필자칼럼대신 많이 읽어주었으면 한다. 오래까지 한국일보 독자로 있으면 필자를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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