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머리에 마치 꼭지처럼 장식한 정자는 자그마하지만 양반의 권위를 한껏 보여주는 장식물이다. 정자는 역사기록에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 정자의 사용이 법으로 규정돼 있었다. 대군은 금정자, 1·2·3품의 대신은 은정자,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원과 관찰사·절도사는 옥정자, 감찰은 수정정자를 했다. 정자는 그러나 이미 고려 공민왕 때 백관의 등위를 구분하기 위해 흑립에 옥·수정등의 정자를 달게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자는 대체로 해태, 해오라기, 박산, 연꽃, 매화등의 무늬를 조각하거나 투각해 만들었는데 그 형태나 재료에 따라 해치(해태)정자, 옥로정자, 법랑정자등으로 불렸다.
새하얀 백옥에 여러 무늬를 빼어난 솝씨로 투각한 옥로정자이다. 신선이 산다는 전설의 산 「박산」을 상징한 몸체를 구리에 도금한 받침이 받치고 있다. 장숙환교수(경원대)는 『이 작은 몸체에 학, 사슴, 거북등의 십장생(사진 오른쪽)과 해오라기를 물흐르듯 깎아낸 장인의 솝씨가 돋보인다』고 말했다.
보통 받침에 여섯 군데의 구멍이 있어 실로 꿰매 갓에 고정한 정자는 구한말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이 27세(1887년) 때 찍은 사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높이 3·5㎝(왼쪽), 4·5㎝. 개인소장.【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