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취적 사고 젊은학인승려 밀집/일제때부터 불교혁신운동 주도/개운사/79년 설립 승려교육 4년제대학/중앙 승가대 개운사와 중앙승가대학. 서울 성북구 안암동 5가 157번지, 언뜻보기에 주택가를 낀 조용한 도심사찰이 조계종단내 변혁 회오리바람의 진원지이다.
개운산자락 끝의 좁은 공간에 전통사찰가옥과 승가대의 현대식 건물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이곳이 종단개혁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합리적이고 신사고를 소유한 젊은 학인승려들이 밀집돼 있기 때문이다.
1396년 무학대사가 영도사란 이름으로 창건, 1779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된 개운사는 5백98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계종 교구본사 조계사의 말사로 있지만 개운사는 일제시대부터 불교개혁과 진보의 흐름을 주도해온 종단개혁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시대엔 민족독립과 불교혁신을 위한 승려들의 결집체인 만당이 이곳에 자리잡고 불교내 독립운동과 혁신운동을 주도했다. 1911년 한국불교를 일본의 조동종에 합류시키려는 이회광의 기도를 오성월 한롱운과 함께 저지한 근대의 고승 정호스님(속명 박한영)이 이곳 강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해방뒤에는 불교내 식민지잔재를 청산하고 통일민주국가 건설을 꿈꾸던 불교혁신동맹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이 흐름이 이어져 50, 60년대 대처승제를 조계종단에서 몰아내는등 불교계 일제잔재청산에 앞장섰고 80년대엔 사회민주화 운동을 불교계에 접목시키기도 했다.
「10· 27」법난뒤 불교자주화를 외쳤던 개운사총무원장 월주스님이 정권의 탄압으로 강제사퇴를 해야 했으며, 86년 불교재산관리법철폐와 불교자주화를 위한 해인사 전국승려대회도 이곳이 중심이 되어 꾸려졌다. 87년엔 민주화운동에 목숨을 바친 이들의 천도제가 치러졌고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군의 제사가 매년 이곳에서 올려진다.
종단개혁운동의 보루인 개운사에 젊고 패기가 넘친 젊은 학인 승려 교육장인 중앙승가대가 위치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앙승가대는 불교개혁과 발전을 위해 승려들의 전문교육장의 필요성을 느낀 젊은 학인승려 5명이 주체가 되어 79년 보현사에 세운뒤 81년 개운사로 옮겼다. 91년 교육부로부터 4년제 정식대학으로 인정받은 승가대는 81년 첫졸업생 이후 11회에 걸쳐 4백16명을 배출했다.
사회와 불교를 잇는 통로로서 현대식 첨단교육과 불교교리를 가르치는 이곳에서 젊은 승려들은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종단운영의 문제에 대한 의식을 깨우침으로써 종단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첨예하게 느낀다. 이번 종단개혁운동에서 이들이 개혁의 최전방에서 톡톡한 역할을 해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김동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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