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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포석이 아쉽다/정운찬(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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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포석이 아쉽다/정운찬(한국논단)

입력
1994.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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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파동에서 드러난 정부의 부정직, 무능, 그리고 국제감각 결여는 북한 핵문제와 관련하여 증폭된 불확실성과 함께 한국경제, 나아가서는 한국사회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이는 국기를 뒤흔드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농림수산부장관 경질과 총리의 대국민사과로 사태를 마무리하려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증거로 밖에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고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이번 파동은 당국자들이 장기적 안목없이 여론의 눈치를 보며 눈앞의 이익만 추구한 결과다. 아직도 선진국대열에 끼이지 못한 우리나라가 협상능력이 약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능력이 부족할수록 모든 것을 세상에 알리고 국민의 협조를 구했어야 했다. 그러나 경험도 부족하고 철학도 빈곤한 당국자들은 매일매일의 인기에만 매달려 정도를 걷지 못하였다.

 그러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고 이에 대한 처방은 무엇인가. 바둑과 관련시켜 생각해보기로 하자.

 나는 바둑을 좋아하는 친구들의 어깨너머로 포석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백지와도 같은 바둑판 위에 의미없이 놓인 것 같던 몇개의 돌이 종국에는 승패를 좌우하는 큰 역할을 한다. 이러한 초반 포석의 중요성은 아마추어의 바둑보다는 프로기사의 바둑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들은 바둑초반부터 끝을 볼 수 있는 장기적인 안목과 치밀한 시나리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경제에 요청되는 것도 국면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방향감각을 가진 유능한 「프로기사」와 새로운 포석이다.

 경제에서 바둑의 포석과도 같은 것은 바로 경제의 틀이다. 말할 것도 없이 경제의 틀은 경제법규, 구조, 조직등과 관련된 성문 및 불문의 규범, 즉 국민경제생활의 범위와 방향을 설정하고 규제하는 테두리를 말한다. 포석을 기초로 바둑을 두듯이 경제정책도 경제의 틀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방향정립 및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틀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못한 경제는 포석이 부실한 바둑과도 같이 결코 건실할 수 없다.

 지금 한국경제는 좋든 싫든 변화하는 세계속에 던져졌다. 상대방과 상황에 따라 포석의 전략이 바뀌듯 우리도 새로운 틀을 확립해야 할 시점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석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체 국면을 꿰뚫는 혜안을 가지려 하기보다는 국지적 전투에만 집착하는 아마추어의 바둑이 판을 친다. 요즘의 표류하는 경제정책을 보면 내가 다시 60∼70년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예를 들면 아직도 물가정책보다는 물가지수 관리정책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경제담당 부총리가 취임초 공공요금 현실화와 가격자유화를 외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약 떠들썩하게 하지 않고 조용히만 추진한다면 왜곡된 상대가격구조를 개선할 좋은 기회로 생각하여 크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물가가 조금 오르자 그는 한달도 못가서 가격을 다시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부가 표방해온 시장경제원칙과 크게 어긋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시적 성과를 올리기 위했음인지 UR와 같은 중요한 일과 관련하여 대외경제정책을 조정할 기획원의 대외정책조정실을 없애버렸다. 이 조치가 비록 기획원의 군살을 빼기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국제화를 크게 내건 정부의 정책과는 동떨어진 일이다. 만일 부총리가 대외정책조정실을 타부처로 이관하는 용단을 내렸다면 몰라도 그것을 없앤것은 옳지 않다.

 또한 최근의 경기회복과정에서 대기업집단과 중소기업간의 불균형이 심각할 정도로 벌어지는데도 정부는 이것을 자연스런 구조조정의 일환이라면서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요사이 벌어지는 불균형은 새 정부의 재벌중심적 경제정책이 낳은 결과이지 경제내에서의 자연스런 조정과정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처럼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정책이나 그릇된 사고는 빨리 불식되어야 한다. 그대신 사려깊고 종합적인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 과거에도 시도되었던 정책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최소한의 우선순위는 정해야 한다.

 정부는 우리경제에서 이상적으로 비대해진 부분의 가지를 치고 상대적으로 발육이 부진한 부분은 지원하는 처방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평의 바탕위에서 효율을 추구해야 한다. 형평과 효율의 꾸준한 추구로 내실만 기하면 UR도 GR도 BR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형평을 위한 개혁은 기득권세력의 조직적 반발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가 어느 때보다도 요청된다.<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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