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독립협회, 독립문―. 19세기말 우리나라의 위기상황과 근대화를 위한 몸부림을 나타내는 명칭들이다. 그 주역의 하나가 누구인가. 서재필박사의 청년기는 독립과 혁신의 열화,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천하 역적으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했다. 수구세력이 주춤해서 귀국한 뒤의 활약은 사뭇 역동적이었다. ◆그는 나라의 독립은 오직 교육 특히 민중을 계발하는데 있음을 굳게 믿고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또 이상재 이승만등과 더불어 독립협회를 만들었고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없앤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모두가 나라의 근대화운동과 민족주의를 키워가는 요람과 같았다. 외세가 위세를 부리고 사대가 판을 쳤던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1896년 4월7일에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태어났다. 창간한 사실만큼 그 시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제정러시아의 힘에 업힌 친로파의 득세로 개화운동의 등불이 꺼져버렸다. 독립신문이 탄생한 것이 그 다음해다. 위기의식이 높았음은 짐작이 가고 남는다. 독립신문은 서울사람에겐 하나의 「경이」였고 위안이었다. ◆독립신문의 형태에서 특기할바는 언문일치와 한글전용이다. 그래서 「국문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풍경은 참으로 새로운 현상이었다」는 감탄이 외국인 사이에서 나왔다. 이 신문을 서재필박사는 두사람의 기자를 데리고 제작하며, 논설과 그밖의 기사를 거의 홀로 써냈다. ◆그분의 유해가 뒤늦게나마 고국땅에 돌아와 안식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유해의 환국도 뜻 깊으나 그 의미를 깊이 새겨볼만 하다. 자칫 망각에 묻힐 역사의 인물을 발굴한다는 뜻이 중요하다. 잊혀져가는 과거의 인물을 부활케 함이 후대의 사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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