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서거 30주년 맞아 내일 연대서 기념강좌/일제치하 분열된 교회 연합 힘써/「연통제」 활동 등 독립운동 업적도 가혹한 일제강점기와 교회분열의 시대를 민족교회론의 기치를 들고 지도해온 남은 김린서목사(1894∼1964)가 재조명된다.독립유공자이며 교회연합운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김목사 탄생 1백주년과 서거 30주년을 함께 기념하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소장김광식)는 4월1일 하오3시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기념강좌를 갖는다.이 강좌에서 민경배교수(연세대 신학)는 논문 「김인서의 민족교회론」을, 이현희교수(성신녀대 한국사)는 「김인서의 민족독립운동」을 각각 발표하여 김목사의 사상과 업적을 분석하고 조명한다.
민교수는 김목사의 민족교회론이 『예수의 복음으로 조선을 사랑한다』는 신념에 기초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분열을 거듭하면서 사회적 과제에 대처할 여유를 갖지 못하던 시기에 「하나의 교회론」을 들고나와 고독한 길을 가야했다는것이다.
민교수가 그를 「예언자적 목회자」로 규정하고 있는것은 30년대 한국교회에서 벌인 농촌사업이나 문화운동, 동양적·조선적 신학론에 그가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농촌·문화사업이 독립투쟁의 순수성을 벗어나 일제의 행정적 간섭으로 인해 반드시 해체되거나 전향할것이며 동양적·조선적 신학구호 역시 자연히 친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는것이다.
연통제(국내 비밀행정조직)와 연계된 김목사의 민족운동에 관해 고찰한 이교수는 그가 개척전도 시절, 신음하는 동포들을 보고 국권피탈의 실상에 눈떴으며 한 농촌지주의 말을 듣고 민족운동에 투신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김목사가 3·1운동 당시 청년들에게 『인재를 후방에 감추고 나와 같이 소용이 작은 인물이 죽음 앞에 서는것이 장래를 위하는 최선책』이라고 밝힌 각오와 재판과정에서 『조선은 조선사람의 조선이니 조선사람이 통치해야 한다』고 외치며 정보망을 누설치 않은 기백 등에서 그의 결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함남 정안군 광덕면의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김목사는 16세때인 1910년 독립운동가 이동휘장군에게서 「죄의 값은 사망」이란 연설을 듣고 기독교에 눈떠 캐나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3·1운동 때는 함북 회령에서 이를 주도했으며 그후 상해임시정부의 함북 연통제 간부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체포돼 징역4년을 선고받았다. 32년 「신앙생활」을 창간했고, 54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현희교수는 『김목사의 독립운동이 신앙적 양심에 따른 기독교인의 자세에서 비롯됐으며, 신앙인의 주도적인 민족운동 참여가 가능하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고 결론짓고 있다.【김병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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