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용 배
<본사통일문제연구소장>본사통일문제연구소장>
수령은 나이들면서 허풍이 늘고 자랑거리가 많아지고있다. 특히 능청도 자주떤다.
91년 8월께로 추정된다. 수령은 백두산을 오르고 온 「장길산」의 작가 황석영을 만나 넉살을 부리고 있다. 『우리가 중국하구 국경문제를 확정한것은 전쟁 뒤였죠. 제일 까다로운것은 백두산 문제였는데 국경문제루 얘기가 나온것은 중국이 혁명하고 얼마 안되었을 때니까 50년 무렵일거요』
청나라때 조선과 맺은 정계비는 찾아보니 백두고원 남포태산아래 근처에 있었다. 중국측은 그 정계비로 국경을 정하자고 했다. 수령은 백두산을 찾기위해 칭병하고 드러누웠다. 『나중에 주은래하고 팽덕회가 온다구 그래. 주은래는 거 사리가 통하는 사람이오. 나는 아프다고 병원에 들어가 있댔지. 기래 둘이서 문병차 왔더구만. 내가 국경문제를 꺼냈디. 그 자리에서 결말이 났소. 압록강은 꼭 절반으로 나누어 강 저쪽은 중국, 이편은 조선 하는식으로 하고 백두산도 그런 이치로 나누었디』
공식기록에는 1958년2월14일에 주총리가 방북한것으로 되어있다. 팽원수는 그때 수행하지 않았다. 외교부장 진의, 부부장 장문천, 해방군 총참모장 속유대장이 수행했다. 이때의 주제는 58년 말까지 중국지원군이 북한을 떠나는것이었다.
그후 1970년 7월에 주총리는 문화혁명으로 소원해진 북을 방문했다. 이때 국경문제가 풀렸을 가능성이 높다. 팽원수는 65년에 부총리에 해임되어 그때에는 북경 교외에 유배되어 있었다.
수령이 그보다 4살위인 주총리를 「사리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것은 정확한것이다. 50년 6월30일께 주총리는 시성문대령(46년 국공 중경회담때 정보참모로 주를 도움)을 정무참사관, 대리대사로 평양에 보냈다.
주은래는 담비 털옷을 마련, 수령에게 보내며 시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중국이 과거에 곤란을 당하고 있을때 우리를 도와준데 꼭 감사를 표하게』라고 했다.
『동지들은 동북지방 전선에서 공작을 해본일이 없어서 아마 46, 48년 동북전선의 정황을 잘모를 거야. 국민당 군대는 남공북수(남방을 공격하고 북방은 현상유지), 선남후북 작전을 세우고 우리 남방해방구를 연속 공격했지. 안동, 통화가 점령되고 곳곳의 해방구가 유격구로 변하고 46년말에는 림강·무송·몽강·장백현(모두 압록강변도시)등만 남게 되었네. 47년 봄에야 임강에서 승리해 동북을 찾을수 있었네. 그게 가능했던것은 남만 아군의 가족이 조선북부에 피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조선노동당 임시정부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이었지』
시는 평양에서 주총리의 이런 감사를 전하자 수령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우리가 마땅히 할일을 한 거지요. 다만 우리가 그때 해방된 직후라 우리 동지들이 일이 서툴러서 좀 고생했을 겁니다』고 했다. 수령은 초기전황을 축하하자 큰소리를 쳤다. 『우리는 항상 조국평화통일을 주장해 왔는데 이승만은 매일 드러친다고 소리치니 한판 할바에야 우리가 역량을 집중해 싸워서 승리를 거두어야 하지 않겠소. 정작 그사람 도무지 맥을 못추고 있소』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6·25의 악몽은 어떻든 4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동안 남과 북은 함께 중국과 국교를 맺었다.
이번 김영삼대통령은 중국 방문에서 「사리가 통하는 인사」를 찾아야 한다. 등소평, 강택민주석, 이붕총리등 사리를 아는 이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제발 82세를 앞둔 수령, 52세의 지도자가 「한판 할바에야」의 무모로 동북아와 세계질서에 무엇을 남길것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주총리는 한반도에 조기참전을 주장했다. 미국과 중국은 조만간 충돌하고 베트남, 대만, 한반도 등 3면에서 공격을 받게된다. 한반도에서의 싸움은 산악이 많아 미국기계화 부대에는 부적합하다. 중국의 운동전에 유리하고 소련과 국경을 접해 원조가 가능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수령에게는 사리가 깊었지만 국제정세에는 사려가 적었다. 중국은 사려있는 정책으로 북의 핵을 다루어야 개방, 개혁의 만개를 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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