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허만 칸의 「일어나는 초대국일본」이라는 책이 나오기전까지만 해도 학자나 정책입안자들 가운데 오늘과 같은 일본의 경제적 기적을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칸의 과감한 예측도 70년대 미국에서는 거의 묵살되었고 당시 일본 보수정치인들이 선거유세때나 일본의 장미빛 미래를 선전하기위하여 그의 이름을 들먹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일본경제의 거대한 규모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가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일본 스스로도 역사상 미증유의 경험이기 때문에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채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일본의 총리부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본인의 45.4%가 「일본이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한일 두 나라는 과거사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전후 반세기동안 많은 인적, 물적 교류가 있어 왔고 이제는 밉든 곱든 머리를 맞대고 같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8·15후 한국은 4명의 대통령이 7차례에 걸쳐 공식, 비공식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일본은 7명의 총리가 10차례에 걸쳐 한국을 찾았다. 92년 기준으로 보면 두 나라의 인적 교류는 2백50만, 물적 교류는 3백10억달러, 그리고 양국간의 항공편은 16개 지점 29개 노선에 주 1백60회나 운항하고 있다.
지난해 한일간의 경주회담에 이어 이번에도 두 나라 정상은 각기 당면한 개혁정치와 이 지역의 안보협력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을 것이며 특히 한국의 김영삼대통령은 자유와 시장경제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한국 민주화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것으로 보인다.
두 정상의 만남에 즈음하여 우리는 21세기를 준비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지금도 일본의 전자상품은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소비자들의 애호를 받고 있으나 정작 그 물건을 만든 주체인 일본인의 참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외국인은 의외로 적다. 전세계 GNP의 15%이상을 차지하고 미국GNP의 3분의 2이상의 경제력을 갖고 있는 일본의 존재는 놀라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3만달러가 넘는 1인당 국민소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나카노 고지(중야효차)의 「청빈의 사상」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그 책의 의미와는 아랑곳없이 미국에서는 빌 에머트(BILL EMMOTT)의 「일본공포증」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다.
인식의 갭을 메울 가교가 보이지 않는다. 한때 미국의 소련전문가는 대부분 반소적인데 비해 일본전문가는 거의 친일적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는 「일본 다시보기」를 외치며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수정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은 무엇보다도 일본인이 구미인들과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들은 과거 라이샤워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론자들의 가설, 즉 일본이 근대화 서구화됨에 따라 구미인들과 비슷한 생활패턴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관점을 거부한다.
이들 수정주의자들은 일본인이 구미인이 이해할 수 없는 룰에 따라 무역거래를 한다고 비판한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소비자중심이 아니라 국가중심, 생산자 중심의 중상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정주의자들은 만약 일본이 계속해서 「변칙적」인 무역거래를 고집한다면 일본을 봉쇄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이들이 「일본 때리기」에 앞장을 서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대한 일본쪽의 반론은 간단하다. 즉 일본은 민주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외국제품을 사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미일간의 쟁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기회에 우리는 어느 한쪽을 편들기에 앞서 일본인의 행동양식과 가치관의 특징인 자제의 역설적 의미, 그 효용과 한계를 꿰뚫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일본인의 그칠 줄 모르는 근면성, 높은 저축률, 몸에 밴 자족정신을 부러움과 함께 두려움을 갖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일본인에게서 부를 뽐내거나 목에 힘을 주거나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렵다. 최첨단의 기술을 가진 1억3천만의 일본국민이 이처럼 한결같이 근면, 자족, 저축을 하면 국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뜨린 우리는 도쿄나 오사카의 좁은 아파트를 냉소하기 전에 좀 더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모자라는 점을 차곡차곡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단계의 우리로서는 일본인의 자제의 미덕을 배워 마땅하지만 그 엄청난 국부에 비해 왜소한 「민부」로 고민하고 있는 일본인으로서는 이제 그 자제의 한계와 벽을 뛰어 넘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일본이 국가수준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사회간접자본과 복지의 수준에서 구미선진국에 비해 크게 떨어져 있고 개인으로서의 기대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은 일본인 스스로가 자기비판하고 있는 터이다.
앞으로 일본은 자기억제에서 자기실현의 시대로 이행해야 하며 모든 경제적 잠재력을 생산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국가중심의 부에서 개인의 복지중심으로 과감히 방향전환해야 할 것이다. 경제구조 개편의 목적을 일본인 개인의 행복에 둔다면 우선 일본국민 자신에게 좋을 뿐만 아니라 미일간의 무역마찰, 나아가 세계속의 일본과 일본인의 위상에도 괄목할 만한 개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보통국가」보다 세계와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국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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