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일지」의 저자 박찬웅씨가 지난 4일 필자를 찾아왔다. 지난해 7월5일자 「남과 북」란에 그를 소개했지만 필자와는 초면이었다. 서울대 법대 4학년때 학생야구연맹이사장, 6·25때는 미군 공수특전훈련을 받은 통역장교였던 그 이지만 체구는 우람하지 않았다. 68세의 나이에도 눈은 상대를 꿰뚫는 냉철함이 엿보였다. 체취에서는 얼렁뚱땅이 없는, 『그건 그런게 아닙니다』를 똑똑히 말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인하대 부교수로 있다가 1975년 캐나다로 이민해 토론토 한국 민주사회 건설협의회 회장을 86년까지 지냈다. 87∼88년 토론토 한인회장도 맡았다.토론토 동포들에게는 깐깐한 민주투사로 알려져 있다.
이런 그가 필자에게 전달한것은 지난해 12월 출판사 「아우내」가 펴낸 그의 「강산려」 1·2·3권이었다. 1권이 「박정희독재·전두환독재」, 2권이 「자유주의와 남북통일론의」, 3권이 「정치·사회··문화평론」이다.
「강산려」 세권에는 그가 야구인으로 「서울신문」, 「동아일보」, 「한국일보」에 54년7월, 54년10월, 57년8월에 쓴 야구관전평부터 93년10월4일 자신의 저서 서언까지 정치·사회·문화·교육에 관한 단상이 실려있다. 특히 2권인 「남북통일논의」는 그가 지향하는 통일론의 변천이 자세히 밝혀져 있다.
필자가 쉬엄쉬엄 읽어본 2권에는 그의 수령부자에 대한 인식, 남과 북이 통일을 다룸에 어물쩡 넘어가는 논리의 비약이 깔끔하게 비판되어있다. 6·25에 목숨을 걸고 참전했고 이제는 70세를 바라보는 60대후반 세대들이 느끼는 현재의 통일논의 환상이 과감하게 지적되어있다.
그는 왜 통일 및 남북문제에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6·25 일지」에서 적은대로 한국내전은 수령의 도발로 발생했다. 그 목적은 한반도의 공산화였다. 배후에는 소련, 협력에는 중국이 나섰다. 그 결과는 남·북 수백만 한민족의 희생이었다.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남의 우익독재자, 북의 좌익 독재자의 국민·인민의 동의없는 그들 이름의 정권 현상유지를 위한 협약이었다. 박정희대통령과 수령은 서로 동업자였고 서로 은인이었다.
그는 거주·사상·언론·선거의 자유가 통일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통일후의 한국에는 국민이 지배하는 민주주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제약된 우익독재국가가 싫어 75년 캐나다로 이민갔다. 그는 토론토 「뉴 코리아타임스」에 「승전고」라는 칼럼을 75년부터 86년까지 썼다.
이 칼럼의 주제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가야할 방향이요, 이에 어긋난 행동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87년 「6·29선언」에 이어 반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서서히 북의 체제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그는 88년5월에 캐나다에서 발행되는 「민중신문」에 고문익환목사가 제시한 「연방제 통일안」을 반박하는 글을 실으면서 통일논의에 대변신을 꾀했다. 평화협정체결, 미군철수,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주장에 그는 「평화」와 「철수」를 반대했다.
그가 꾸준히 관찰한 바로는 수령부자는 협정을 맺을만한 신뢰와 도덕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6·25의 도발자인 수령이 인민이 뽑은 통치자로 바뀌고 북에서 민주정치가 실현될 때까지 미군철수, 군사력 감축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론 내리고 있다. 통일은 우리민족이 잘살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이념과 제도를 초월해서 대화와 교류를 할 수 있으나 통일은 되지 않는다. 통일보다 앞서는 가치가 국민의 기본인권과 경제적인 풍요다. 자유와 풍요를 위해서 통일을 희생할 수 있다. 통일을 위해 자유와 풍요를 희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화려한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키기 위해 이 책들을 「강산려」라 이름붙였다. 통일지상주의, 감상주의, 환상에 싸여 이 강산을 다시는 뺏기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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