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외국어로 꾸는 “국제화 주역”/2∼3년 지옥훈련… 최소3개어 자유자재/자격증 취득 취업땐 하루수입 500∼1,000불 프레데릭 라부르(26·여·프랑스)의 하루는 아침일찍 눈을 뜨면서 라디오를 켜는 일로 시작된다. 그녀의 라디오는 24시간 뉴스만을 방송하는 「프랑스 엠포」에 고정돼 있다. 바게트빵에 커피한잔의 아침을 들면서 그녀의 귀는 라디오에, 눈은 영국신문 「더 타임스」와 스페인신문 「엘 파이스」에 쏠려있다. 식사를 하면서 귀는 불어를 듣고 눈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읽는 세가지 일을 그녀는 매일 반복한다.
르몽드, 이코노미스트, 뉴스위크등 각나라 신문·잡지로 가득한 가방을 메고 그녀는 집을 나선다. 지하철에 오르면서도 헤드폰을 끼고 또 뉴스를 듣는다. 그녀는 기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좇는 뉴스와 정보의 양은 엄청나다.
나이에 비해 세계정치와 경제 과학 문화 환경 신기술등 모든 분야에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다. 지하철안에서 불어뉴스를 들으며 이를 영어와 스페인어로 되뇌어보는 그녀의 꿈은 전문동시통역사가 되는것이다.
그녀는 블로뉴 숲이 내려다보이는 파리외곽의 프랑스 고등 통·번역학교(ESIT)에 도착했다. 지난 2일 이학교의 1학년 한 강의실. 한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본부의 국제회의실로 사용됐던 교실에는 여교수 1명과 학생 14명이 원형으로 둘러앉아 수업을 시작했다. 분위기는 학생들의 다양한 국적만큼 자유롭고 수업은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다.
한 여학생이 나와 칠판에 인체의 세포를 그렸다. 그녀는 DNA, RNA등 어려운 용어를 설명한 후 짧은 논문을 발표했다. 주제는 「생체외의 단백질 생성」에 관한것. 의학박사역할을 맡은 그녀는 단백질 생성연구가 어느정도 발전해 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불어로 발표했다. 학생들은 열심히 속기하느라 손이 쉴 틈이 없다. 발표가 끝난후 학생들은 돌아가며 연사의 발표 내용을 영어로 통역했다. 교수는 학생들이 잘못 전달한 부분과 어색하게 옮겨진 어휘를 교정해 주었다.
교실 한쪽의 부스에는 2학년 학생 두명이 헤드폰을 끼고 연사의 발표를 영어로 동시통역하는 연습을 하고있었다. 옆교실에서는 「남아공의 문제」를 주제로 한 같은 방식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학교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도대체 국적을 가늠할 수가 없다. 어느 언어가 모국어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영어와 불어가 유창하다.
학생들은 이학교에서 최소한 3개언어를 통역하고 번역하는 능력을 배운다. 영어와 불어는 의무적으로 구사해야한다. 따라서 모국어를 포함, 3개언어에는 능통하며 학생에 따라 보통 4개국어·5개국어를 말하기도 한다.
「랭귀지 콤비네이션」(언어배합)은 불어·영어를 기본으로 독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러시아어·아랍어·중국어·일본어를 불어 또는 영어로 통·번역하는 교육과정이 있다. 아시아계등 소수언어를 모국어로 갖고있는 학생들의 경우는 약간 다를 수도 있다.
ESIT는 세계에서 가장 전통있고 유명한 통·번역대학중 하나로 재학생과 졸업생의 수준은 세계최고이다. 보통 파리와 제네바·하이델베르그의 통·번역대학을 이 부문에서의 3대명문으로 꼽는데 ESIT가 선두이다.
지난 57년 개교한 이 학교는 현재 파리 3대학(소르본 누벨대) 부설 특수대학원이다. 2년과정의 통역부와 3년과정의 번역부로 나눠져있다. 이 학교 졸업에 성공하면 학생들은 즉시 유엔이나 유럽연합(EU), NA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등 국제기구의 회의동시통역사나 국제간, 기업간의 각종외교문서나 계약관계, 법규등을 번역하는 전문번역사 또는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다.
입학시험부터 일정수준의 통·번역 수준을 요구하는만큼 학생수는 매우 적다. 통역과정은 한번만 재응시가 가능하다. 현재 통역부에는 70여명이, 번역부에는 2백여명이 재학중이다. 한국학생도 통역부에 4명, 번역부에 1명이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졸업생수는 더욱 적다. 매년 통·번역부에서 각각 10여명, 30여명정도가 졸업하고 있다. 입학동기중 20% 미만이 학위를 따는데 성공하며 나머지는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며 학교를 중도에 떠나는 수밖에 없다. 진급시험에 두번 떨어지면 퇴교다.
이는 그만큼 전문 통·번역사의 길이 어렵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 학교는 언어를 가르치는게 아니고 통역의 기술과 모든 분야에서의 전문적 지식및 정보를 습득시킨다. 이해와 전달은 인간만의 고등정신능력으로 기계가 대신 할 수 없는 분야다. 그래서 학생들은 정확하고 완전하게 옮기기 위해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 전통, 관습까지도 익혀야 한다. 학생들은 수업외에 다국적 학생들간의 자발적인 그룹 스터디등을 통해 졸업시험에 통과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다.
현재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 등록회원은 2천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아직까지 전문통역사는 젊은이들의 도전을 기다리는 미개척분야다. 46년 뉘른베르그재판에서 최초로 회의동시통역사가 전문직업인으로 인식된 이래 그 수요는 세계가 다양화되고 상호교류가 증대될수록 늘어나고 있다.
고등소수전문직종으로서의 긍지가 큰 통·번역사들은 보수도 상당한 수준이다. 자격있는 통역프리랜서의 경우 보통 하루에 5백∼1천달러를 받고있다.
이 학교 교수이면서 국제회의 통역사로 활동하고 있는 필립 민스교수는 한국의 국제화캠페인을 잘 알고 있다며 『국제경쟁력과 국제화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교류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문 통·번역사야말로 보이지 않는 국제화의 첨병이며 국력은 결국 랭귀지 파워와도 직결된다』고 강조했다.【파리=한기봉특파원】
◎한국유학생이 본 ESIT/어휘공부외 정치·문화배경까지 배워/“언어는 국가위상 지표… 정부 관심을”
프랑스고등 통·번역학교는 자질있는 「세계인」을 양성하는 고등전문교육기관이다. 나는 세계 20여개국에서 온 5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이 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많았으나 대학교수 교사 방송기자 공무원 음악가 심지어 모델까지 전직이 매우 다양했다.
전문 통·번역사를 꿈꾸는 학생들은 단지 말과 글을 옮기는 기술만을 배우는게 아니다. 훌륭한 통역과 번역을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모든 정치·사회·문화적 배경과 지식을 알아야 하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첨단기술과 신학문을 익혀야 한다.
그래서 통·번역이란 매우 「인간적인 일」이며 진취적이며 개척이 무한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또 통·번역과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국제기구와 회의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맛보는것은 참으로 매력있는 일이다.
ESIT생활에서 배운 소중한것중 하나는 대화의 가치이다. 국제관계나 인간관계·이해관계는 모두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것이다. 통·번역사가 되길 원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남의 의견을 잘 듣고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는 태도와 능력을 키우는것이 어휘실력보다 훨씬 중요하다. 한나라의 언어가 경제력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도 느꼈다. 우리나라도 한국어의 세계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정책적인 노력과 함께 특히 한국어를 가르치거나 배우길 원하는 외국교육기관이나 학생들을 지원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아쉽다고 생각한다.【강민휘·26·ESIT 통역부1년·이화녀대 불문과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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