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 총동원·철통보안속 밀거래/협회자금·조건붙은 돈은 금기시/사정영향 “급감”… “지구당 타격”호소 국정감사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해 10월 중순 서울L호텔 지하 일식집.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던 J의원은 평소 알고 지내는 L기업의 중역과 모은행의 간부를 만났다. 평소라면 달려와 악수를 청할 그들이 오히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J의원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쪽 특실에서 P의원이 나오고 있었던것이다. J의원은 왠지 불쾌해졌다. J의원은 당시 상황을 더듬으면서 불쾌감의 배경을 나름대로 설명했다.
『P의원은 국회가 열리기만 하면 L기업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왔다. 지난 국감때도 예외없이 독설을 퍼부었고 L기업에 부담되는 자료를 내놓기도 했다. 때문에 P의원과 L기업 중역의 만남은 누가봐도 무마용 로비였다. 은행간부는 두 사람과 모두 친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위해 함께 한것 같았다. 초선인 나는 평소 정부나 기업체에 대해 우호적이었지만 그들로부터 대접받은 적이 없었다. 「조져야 떡 하나라도 더 생긴다」는 정치권의 속어가 떠올랐다』
그후 P의원의 상임위 발언에서는 L기업부분이 거의 사라졌다. 상임위 주변에서는 『푹 삶았군』이라는 수군거림이 나돌아다녔다.
그러나 P의원은 『아무리 요즘 춥다고 하지만 노출된 사안을 놓고 거래하는 하수가 어디있는가』라며 로비설을 강력히 부인했다. 악감정을 가진 기업의 로비를 받는것은 위험하다는 얘기였다. 최근 P의원은 다른 기업에 대해 집중적인 추궁을 시작하고 있지만 그의 목적이 로비유도인지 의정활동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로비는 주고받는 당사자만이 아는 은밀함과 부정적 거래를 특징으로 한다. 때문에 로비의 전말이 구체적으로 노출된 예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의원들은 『질의나 자료요구등 의원의 행태를 보면 로비의 내막과 유형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3선의 노련한 정치인으로 알려진 L의원은 두 가지로 로비를 정리했다. 『국정감사나 대정부질의는 야당의 몫이고 굵직한 법안통과와 이권은 여당 몫이다. 야당에는 조용히 해달라고, 여당에는 한건 달라고 부탁하는것이다. 액수를 기준으로 하면 1백만∼2백만원은 이른바 떡값이고 5백만원이나 천만원이상이면 로비라 할 수 있다』
업계출신으로 직접 로비를 해본 L의원은 기업의 입장에서 설명했다. 『국감이나 상임위에 앞서 의원들은 자료를 요구한다. 이들 자료중 특정 기업이나 정부부처를 곤혹스럽게 하는 내용이 있다. 의도적으로 로비를 유도한 성격도 있고 진지한 의정활동인 경우도 있다. 기업이 정보를 입수하면 사안의 성격, 의원의 비중을 놓고 저울질한다.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면 연고가 동원된다. 학연 지연 인연이 있는 중역이 나서는것이다. 이 대목에서 기업은 액수와 비밀유지에 제일 신경을 쓴다. 노동위 돈봉투사건은 두 가지 모두 세심히 따지지 않은 한국자동차보험의 실수에서 비롯됐다』
야당의 중견의원인 K의원은 『로비가 시도되면 조건이 나온다』며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초선때 사심없이 한 대기업의 비리를 따졌다. 얼마후 고교선배인 그 회사 중역이 5백만원을 가져왔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자 얼마후 두배인 1천만원을 가져오더라. 그리고 앞으로 계속지원하겠다는 은근한 다짐을 했다. 그 때 로비를 유도하는 방법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질의나 자료요구를 매개로 한 로비가 일반적이지만 큰 규모는 아니라는게 정설이다. 굵직한 로비는 대개 중요한 법안통과나 이권에서 파생되며 이때 친목·이권단체인 협회들이 개입한다.
야당의 중진 K의원의 술회. 『공화당정권시절 처음 당선되자 선배의원이 나를 불렀다. 선배의원은 나에게 정치자금을 조달할줄 알아야 정치인으로 입지를 세울 수 있다면서 정치자금조달법을 강의해 주었다. 그러면서 선배의원은 반드시 받아서는 안되는 자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한마디로 꼬리달린 돈은 받지 말아야 한다는것이었다. 이 「꼬리」에는 ▲조건이 달린 돈 ▲친목단체나 협회가 제공하는 돈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배의원은 만약 이런 돈을 받으면 나중에 반드시 말썽이 일어 정치생명이 끊어진다고 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말을 지키고 있다』
구민주당의 박재규전의원이 90년2월 구속된 사건이 바로 법개정 로비를 벌인 방제협회로부터 돈을 받은후 말썽이 생긴 대표적사례였다. 법개정으로 신고제가 되면 신규 방제업자들이 속출, 기존 방제업자들의 기득권은 상실될 상황이었다. 박의원은 방제협회의 로비자금 2억2천만원을 받아 법개정을 막았다.
박의원구속때 로비와 관련된 금기가 정치권에 회자됐다. 다수가 포함된 협회의 돈을 받을 경우 소문이 나고,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린 사안에서 한쪽의 로비를 받으면 꼭 말썽이 난다는것이었다. 후자의 대표적 사례가 노동위돈봉투사건이라 할수있다. 농약관리법외에도 한의사와 약사단체의 치열한 힘겨루기를 촉발했던 약사법, 몇해전 사학재단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켰던 사립학교법등 많은 법들이 무수한 로비설의 대상이었다.
로비의 정점은 역시 이권이 걸린 사업. 대표적인 이권은 건설공사, 거액융자, 공기업불하, 예산조정등이다. 그러나 이권개입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관련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있는」의원이어야 한다. 과거정권에서는 수백억∼ 수천억원의 이권에는 청와대가 개입했다는것이 통설이었다. 때문에 의원이 로비대상으로 부각되는 이권은 대개 수억∼1백억원대라 할 수 있다. 융자나 공사를 성사시켜주면 3%, 5∼7%정도의 커미션을 받는다. 지역구의원이 사업예산을 자기 지역에 끌어 오면 해당예산에 대한 입김을 갖게 된다. 자연히 의원의 주변에는 지역업체들이 몰려든다.
이밖에도 평소 관리하는 광의의 로비도 있다. 관리는 단순히 우호적인 의원을 만드는 수준도 있고 기업오너가 투자차원에서 비밀리에 특정 거물의원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의원들은 「평소 관리」를 악용, 병원에 입원하거나 해외에 나가면서 소규모 촌지성로비를 유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국회주변에는 다차원의 로비가 이루어지지만 김영삼정부가 출범한 이후 로비의 규모와 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는것이 여야의원들의 이구동성이다.
사정바람에 기업은 물론 의원들도 조심하고 의원들의 부탁이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않고 있다. 『잔뜩 기대했지만 별게 없더라』는 일부 초선의원도 있고 『13대초에는괜찮았는데』라고 말하는 재선이상 의원도 있다. 심지어 『정치는 고도의 서비스산업인데 너무 박한 풍토로 만들면 정치의 활력은 약화된다』는 불만도 터져나오고 있다. 실제 지역구등을 겨우겨우 꾸려나가고 있는 의원들도 상당수가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원들이 「깨끗한 정치」의 물꼬가 변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분위기이다. 때문에 정치권은 음습한 과거로의 회귀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대신 선거혁명, 방만한 정치행태근절등으로 「돈안드는 정치」를 만들고 후원회를 통한 양성화된 정치자금조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로비의 양성화·제도화도 개혁정치시대에 의미있게 거론되고 있다.【이영성기자】
◎어느 초선 의원의 고백/“요구자료속 수표… 강한 유혹이…”/고민끝 반송하니 현금다발로 “집요공세”
『한번도 로비를 받은 사실도 없다』고 말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면 그는 철면피이다. 국회의원이라면 최소한 한번 이상은 크든 작든간에 로비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 돈뭉치를 보며 받아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한 경험도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개혁정치를 내세우는 초선이지만 작년 국정감사때 집요한 로비를 받은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초 나는 보좌관과 함께 국감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특히 관변단체들의 무용성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참 보좌관과 토론을 하고있는데 어떤 점잖은 인사가 들어왔다. 알고보니 한 관변단체의 장이었다. 그는 관계부처에 요구한 자료를 직접 가져와 해당단체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잘좀 봐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갔다.
나는 바쁜 일정으로 다음날에서야 그 서류를 들춰보았다. 그 안에 흰봉투가 하나 들어있었다. 그냥 돌려보낼까 하다가 일단 얼마인지 알아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1백만원권 수표5장이 들어있었다. 예상보다 많은 액수였다. 솔직히 5백만원의 돈을 보는 순간 강한 유혹을 느꼈다. 『밤샘 고생을 하는 비서진들에게 용돈도 줄 수 있고 근근이 꾸려나가는 지구당에도 단비가 될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회의원이 되고서 밥 한끼도 제대로 못사준 후배들도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한번 무너지면 끝이다』고 되뇌었다. 비서를 시켜 온라인으로 돈을 보냈다. 바로 다음날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아무 탈 없다』 『그냥 인사다』 『앞으로 잘 지내자』며 서둘러 갔다. 자리에는 1만원권 1백장묶음 5개가 든 큰 봉투가 있었다. 내가 수표를 꺼려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곧바로 다시 온라인으로 5백만원을 되돌려보냈다.
그리고 상임위에서 줄기차게 관변단체를 물고늘어졌다. 그후 국감기간내내 돈봉투의 발길은 끊어졌다. 나중에 들으니 『괜히 잘못 줬다 망신당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고고한 성직자는 아니다. 상임위원장이나 장관이 명절때 『판공비에서 나눠쓰자』며 준 50만원과 1백만원은 받았다. 그것마저 거절하면 「독한 놈」이라고 욕 먹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야말로 의정활동에 영향을 받지않는 「떡값」으로 생각했다.
로비의 유혹을 접하면서 나는 새삼 『후원회를 건실하게 키우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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