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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교수가 보는「갑신정변」/신용하교수(개혁풍운아김옥균:15·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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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교수가 보는「갑신정변」/신용하교수(개혁풍운아김옥균:15·끝)

입력
1994.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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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비병이 화 불렀다/개화당과 적대 일측 태도돌변 추파/결정적순간 철병… 거사 끝내물거품 1백년 전 백척간두에 있던 나라의 운명을 혁명적 방법으로 바로 세우고자 했으나, 여건의 미성숙으로 좌절한 인간 김옥균의 생애를 재조명한 시리즈 「개혁 풍운아 김옥균」이 15회로 막을 내린다.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을 받던 이 시리즈의 마지막 회는 근대사 분야의 권위자인 신용하교수(서울대)의 명석한 분석으로 역사적 의미를 새겨본다.【편집자주】

 김옥균을 지도자로 하는 갑신정변의 역사적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당시의 국제환경과 국내의 사회적 조건에 이를 관련시켜 고찰할 필요가 있다.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국은 우리나라에 3천명의 청군을 파견하여 주둔시키고, 이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대한 적극간섭정책과 실질적 속방화정책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개화당의 개화정책을 청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정책이라고 보고 이를 집요하게 저지하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는 열강의 식민지화 시도에 대항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청국의 적극간섭정책과 속방화정책을 극복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로 되었다.

 또한 일본은 이미 1855년께부터 정한론을 정립하고, 1868년 신정부의 명치유신에서는 근대국가 건설과 정한이 양대 국책으로 되어 급속히 제국주의 국가가 되기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정책을 집행하고 있었다. 일본이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점령할 수 있는 제국주의 국가의 실력을 갖춘 시기에 대해 1894년설과 1904년설이 있지만, 어느 설을 취하든 일본이 제국주의국가의 실력을 갖추는 날 정한을 자행할 것이므로, 조선은 그 이전에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자주부강한 근대국가와 근대적 부국강병체제를 수립해야 했다.

 이러한 객관적 국제환경 조건 속에서 김옥균 등 조선의 젊은 개화당은 가능한한 빨리 정권을 장악하여 정부의 권력으로 위로부터의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여 단시일에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내의 사회정치적 조건은 시민층과 국민이 정치적으로 미성숙하여 개화정책의 화급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아래로부터의 개화당에 대한 지지층은 성숙되어있지 않았다. 도리어 집권한 민비수구파가 청군과 결탁하여 개화당을 정치적 위협세력으로 간주하여 날이 갈수록 경계하며 억압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884년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국과 프랑스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청국이 서울주둔 청군 1천5백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키고 서울에는 1천5백명의 청군병력만 남게 되었다. 이어서 6월에는 북 안남에서 청불전쟁이 일어났고, 8월에는 프랑스함대가 청국복건함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당은 정변을 일으키어 정권을 장악하기로 1884년 9월 결정하였다. 정변의 결정은 전적으로 개화당이 자주적으로 결정한 것이었으며, 이때 일본측은 개화당에 적대적이었고 수구파에 호의적이었다.

 김옥균이 지도하는 개화당은 충의계 계원 약 40여명, 사관생도 13명, 조선군 친군영 전·후영군 약1천명 등 합계 약1천50명의 무력을 준비하여 1천5백명의 청군에 대항해서 정변을 일으키려고 준비하였다. 이때 본국 휴가에서 귀임한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죽첨진일랑)가 개화당에 종전의 태도와 정책을 갑자기 바꾸어 김옥균 등에게 정변의 경우에는 일본공사관 호위무력 1백50명을 빌려주겠다고 먼저 제의해왔다. 이에 일본군1백50명 차병이 밀약되어 정변무력은 약1천2백명이 되었다.

 개화당은 1884년 12월4일(음력 10월17일) 저녁 우정국 낙성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정부의 구성은 개화당의 대표로서 좌의정에 홍영식을 임명하고, 재정은 김옥균, 병권은 박영효와 서재필, 외무는 서광범, 도승지(국왕의 비서실장)는 박영교가 담당하는 체제를 구성하였다.

○지지층도 없어

 개화당의 신정부는 12월5일 저녁부터 혁신정강을 검토하여 12월6일 아침 이의 제정을 완료하고 국왕의 재가를 얻어 이를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청국에의 조공폐지와 독립강화, 양반신분제도 폐지와 국민평등 실현, 문벌제도 폐지, 재정과 경제개혁, 정부기구의 개혁과 내각제도의 실시, 환곡제도의 영구폐지, 교육제도의 개혁, 상업제도의 개혁, 경찰제도의 개혁, 군사제도의 개혁 등을 비롯해서 국정 전반에 걸쳐 근대국가건설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국왕 고종은 1884년 12월6일 하오3시에 개화당 신정부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근대국가건설을 위한 「대정유신」을 단행한다는 조서를 공포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바로 이 시각에 1천5백명을 2대로 나누어 궁궐을 침범해서 정변군을 공격하였다. 몇차례 전투가 있은 후에 정변군은 패배하고 갑신정변은 실패하였다. 홍영식, 박영교와 일부 사관생도는 국왕을 호위해다가 청군에 넘겨준후 청군에게 참살당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일부 사관생도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신정변 실패의 원인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특히 주목된다.

 첫째, 청군의 불법 궁궐침범과 군사적 공격이다. 청군은 조선국왕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채 궁궐 안으로 군사적 공격을 자행하여 정변을 무력으로 붕괴시켰다. 이것은 전적으로 불법범궐이었으며, 군사적 만행이었다.

 둘째, 개화당의 일본군 차병과 일본군의 철병이다. 개화당은 이들의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에 대한 견제력으로 사용하려고 「일병은 와서 짐을 호위하라」는 고종의 친필명령서까지 얻어다가 일본군을 합법적으로 차병했으나, 일본군은 결정적인 순간에 끝까지 싸우지 않고 철병해버림으로써 갑신정변을 붕괴시키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셋째, 민중의 지지 결여이다. 민중은 왜 정변까지 일으키며 시급히 개화를 해야 하는지 아직 잘 알지 못했으므로 개화당의 정변에 냉담하였다. 만일 민중의 지지만 있었다면, 서울시내의 청장년들만 봉기해도 청군의 군사개입은 저지될 수 있는 것이었으나, 민중은 시종일관 정변에 냉담하였다.

 넷째, 시민층의 사회적 정치적 미성숙이다. 개화당의 혁신정강과 개화정책은 근대 시민적인 것이어서 시민층만 성장해 있었으면 확고한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사회는 시민층이 미성숙하여 신정부는 확고한 지지층을 갖지 못하였다.

 다섯째, 개화당은 정변과정에서 민비를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지 못하고 민비와 청군이 경기관찰사 심상훈을 통하여 비밀리에 연락하는 것을 색출하지 못한 몇가지 기술적 실수를 저질렀다.

○침략 디딤돌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실패요인은 일본군 무력을 차용한 요인이다. 청군의 조사개입은 어차피 예견된 요인이었다. 김옥균 등 개화당은 당시의 국제적 모순을 이용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해서 일본군을 이용하여 견제해서 막고, 국내 수구파는 국내 개화당이 맡는다는 전술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 전술은 적중하지 않았다. 정변에 참가했던 일본군은 결정적 순간에 개화당의 기대를 배신하여 철병해버림으로써 정변 전체를 와해시켜버렸다.

 일본측이 개화당에 추파를 던진 것은 개화당을 침략의 통로로 이용하려 한 것 뿐이었고, 정작 개화당이 집권하여 조선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바라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정한론이래 그들이 침략하려고 노리고 있는 조선이 강대하게 되면 침략이 불가능하게 될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 또 하나의 부강한 근대국가가 건설되어 일본의 경쟁국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옥균이 중심이 된 갑신정변은 아무리 필요하고 애국적인 목적을 갖고 있어도 그 수단에 있어서 침략의도를 가진 일본의 힘을 일부 빌려서 수행하려 해서는 실패하고 만다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우리들에게 남겨 주었다.

◎김옥균의 후손들/소설가 김성종씨 「손녀의 사위」/양자 김영진씨 슬하에 8남매… 넷만 생존

 「여명의 눈동자」로 유명한 추리소설가 김성종씨(53)는 끊길뻔하던 개혁가 김옥균의 가계와 명맥이 닿아 있는 손녀의 사위이다. 부인 최애경씨(45)가 김옥균의 손녀인 김명한씨(93년 사망)의 맏딸이기 때문이다.

 김옥균이 재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간 것 처럼, 아들이 없던 김옥균의 호적에도 19세의 조카 김영진씨가 양자로 입적됐다. 그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된 직후였다. 김영진은 아산군수로 있던 1914년 아산에 김옥균과 부인 유씨의 합장묘를 조성한 사람이다. 

 박복하게도 「역적」의 아들이 된 그는 입적되자마자 일본으로 도망쳐 「동가식서가숙」해야 했지만 뒤에 돌아와 아산군수를 지내는 등 관료로서 일생을 보냈다. 김영진은 슬하에 4남4녀를 두고 다복한 생활을 꾸리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노환으로 숨졌다. 이 8남매 중 다섯째인 명한씨가 김성종씨의 장모인 것이다.

 8남매 중 생존해 있는 사람은 김옥균의 손자인 문한(58·회사원) 태한씨(54·회사원)와 손녀인 순한(80) 필한씨(60)등 네 명 뿐이다. 문한씨는 D그룹 계열회사의 뉴욕지사에서 일하고 있고, 태한씨는 서울에 있는 영화용 필름 수입업체 「한불교역」의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김성종씨는 『결혼하기 1년전 쯤인 73년 아내로부터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을 추모하는 모임은 선대에서 있었을 뿐 요즘은 친척들 사이에서도 잊혀져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옥균을 『한말 혁신개혁을 통해 국운을 바꾸려한 웅대한 의지가 암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에 의해 좌절된 비운의 정치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비운의 정치가」 김옥균을 다룬 추리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미스터리」는 내가 좋아하는 주제입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섭렵한 후에 선생의 암살을 다룬 미스터리 소설을 쓸 생각입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한 직후 유씨부인의 등에 업혀 모진 삶을 꾸려야 했던 「일곱살 난 딸」의 소식에 대해 유족들은 모두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김영진씨의 장남 성한씨(90년 사망)가 85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 딸은 어려서 죽었다』고 말했었다.

 이들이 김옥균의 가계를 잇는 몇몇 후손들인 셈이다.【서사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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