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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과 문화적 소양/이인호(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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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과 문화적 소양/이인호(한국논단)

입력
199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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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한 신문에서 읽은 짤막한 1단기사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부터 외무고시 과목을 일부 조정하여 실시하기 위해 공무원임용령을 개정할 방침이라 한다. 헌법·영어·한국사·문화사·정치학의 다섯개 1차시험 과목중에서 문화사를 빼는 대신 국제법을 넣고, 정치학을 국제정치학으로 바꾸며, 2차시험의 영어·국제법·국제정치학·경제학·국민윤리등 5개 필수과목 가운데서는 국민윤리를 빼고, 필수선택인 제2외국어를 일반선택으로 전환하는것이 그 조정의 내용이다. 결국 외무고시를 보는 사람들은 1차, 2차 두번에 걸쳐 영어·국제법·국제정치 과목에 대한 시험을 중첩되게 치르고 그 밖의 필수로는 헌법·경제·국사만 공부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고시의 주관부서는 총무처이지만 내용상 직접 영향을 받을 부서는 외무부이니 만큼 두 부서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쳐 마련한 조정안이리라 짐작된다. 경위가 어찌 되었든 그 조정의 내용이 너무도 뜻밖이고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급전하는 국제상황속에서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의 이익을 신장해 나가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언어와 문화집단들을 상대해야하는 우리 외교관들이 아직까지 문화사적 소양을 충분히 쌓을 기회가 없었다면, 서둘러서라도 그것을 촉구해야 할 때가 지금이다. 그리고 영어 하나로는 이제 결코 국제무대에서 민활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된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외무고시의 과목으로 들어 있던 문화사와 제2외국어를 이제 필수에서 뺀다니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대통령이 국제화를 강조하고 영어의 조기교육실시를 제의하니 총무처는 혹시 「영어」아니면 「국제」라는 이름이 붙은 과목만을 강조하는것이 그 뜻을 가장 잘 받드는것이라고 착각한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진작에 문화사도 「세계문화사」가 아닌 「국제문화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들 외교관 지망생을 가려내는 시험에서 잘려나가는 수모를 면할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마저 뇌리를 스친다.

 이번 일을 만든 주역은 물론 총무처이다. 그러나 정부가 그러한 이상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교가 무엇이고, 국제사회의 중진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것이 우리의 실리를 확보해 나가는데 가장 중요한것인가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부족이 깔려 있는것이 아닌가 싶다. 오랜 세월을 중국의 그늘에서 살다가 그 다음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광복후로도 계속 약소민족으로 냉대와 차별을 참아왔던 우리는 경제가 어느 정도의 국제경쟁력을 갖추자마자 우리에 대한 바깥세계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88올림픽으로 대표되는 홍보작전에 성공한 결과 우리를 보는 국제사회의 눈은 크게 달라졌고, 우리의 실력을 과대평가하는 이웃들이 우리에게 힘겨운 부담을 떠넘기려고 압력을 가하는것이 이제는 오히려 고민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거의 완전히 등한시해 온 일이 외부세계를 깊이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우리가 발전하는 동안 남들도 변하고 있음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붕괴에 대한 대비가 없었고, 경제에서도 이제 후발국들에 추월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우리는 상대국들의 정치·경제적 현황에 관한 단면적 정보를 수집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들이 어떠한 역사와 문화전통,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미리부터 연구하고 이해하는것이 국제관계를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데 절대 필요하다는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적성국가로 멀리 했던 헝가리와 국교가 수립되었을 때 초대 대사 에트레씨가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것을 보고 우리는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헝가리라는 나라에 대해 친화감을 느꼈는가. 헝가리에 관한 지식을 갖기에 앞서 바로 그 대사의 문화적 소양이 헝가리라는 나라의 수준을 우리에게 보여준것이다. 많은 선진국 외교관들의 경우 우리나라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한국전문가로서 훌륭한 책을 써내는 예를 흔히 본다. 미국의 외교관 핸더슨씨가 청자, 백자등 우리의 고급 문화재를 엄청나게 많이 수집해 가져감으로써 우리의 분통을 터트린것도 그가 동양 미술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외교관은 국제관계 전문가만이 아니고 나라의 얼굴이며 외교는 법적 분쟁이기에 앞서 고급수준의 사교이다. 그래서 외교관이 될 사람들은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들과는 레오폴드 셍고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독일 사람들과는 바그너의 음악과 나치즘의 관계에 관해 논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국제적 수준의 교양을 갖춘 문화인이어야 하며, 상대하는 나라의 언어 아니면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국제어쯤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의 횡포가 심하던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외국의 공관원들이 파견국 사람들과 교제하기 보다 한국에서 외유나온 정객들 뒷바라지에 많은 시간을 낭비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병폐가 줄어든 대신 외교가 총력전에 접어든것이며 문화적 소양과 외국어 실력은 그러한 투쟁에서 판가름을 가져오는 무기인것이다.

 총무처는 외무고시의 필수과목에서 제2외국어와 문화사를 빼고 국제법·국제정치·영어만은 1, 2차에 걸쳐 두번씩 시험보게 하는것이 개선 아닌 개악이 아닌지 다시 검토해 보기를 촉구한다.【서울대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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