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10대초 율곡사상 몰두 “혁명의 싹”(개혁 풍운아 김옥균:14)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10대초 율곡사상 몰두 “혁명의 싹”(개혁 풍운아 김옥균:14)

입력
1994.02.22 00:00
0 0

◎성장과 학문배경/차령고개마을 “신동” 양부따라 상경/시화로 명성날리며 22세 문과 급제/오경석·유대치·박영효·서광범등과 비밀교분… 거사 한발한발 충남 천안에서 공주로 가는 23번 국도를 따라 38쯤 떨어진 곳에 「김옥균선생 생가지」라는 간판이 서 있다. 야산으로 뻗은 황톳길을 1백가량 올라간다. 무궁화나무와 철책으로 둘러싸인 1천5백평 가량의 빈터가 산중턱에 덩그렇다.

 잡초가 어지러운 땅가운데 80년대초 그의 유족이 세운 높이 5의 제법 웅장한 「김옥균선생 추모비」가 외롭게 서있다. 생가터 입구에는 걸음마하는 김옥균을 지켜 보았을 감나무 고목이 서있고, 15평 정도의 자형 집터에는 주춧돌만 남아 풍우의 마모를 견디고 있다.

○2남2녀중 장남

 멀리 차령산맥의 준봉인 무성산이 바라 보인다. 남서향이긴 하나 배산림수한 그 터는 명당같아 보였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1851년인 철종 2년 2월23일(음력 1월23일) 이곳 충남 공주군정안면광정리에서 감역관을 지내던 김병태와 부인 송씨 사이에서 2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차령산맥을 경계로 천원군과 이웃한 광정리는 차령산맥의 끝자락에 파묻혀 있는 산골마을이기도 하다.

 안동 김씨 집안이었지만 그의 부친은 안동 김씨의 세도가 한창일 때에도 벼슬에 오르지 못한, 이름 뿐인 양반이었다. 딸 둘에 이어 얻은 아들의 얼굴이 『백옥처럼 희고 곱다』며 기뻐한 그의 부친은 돌림자인 「균」자를 넣어 옥균이라 이름지었다. 기울어가는 살림이었지만 아들에게 거는 양친의 기대는 결코 작지 않았다.

 1853년 그의 일가는 충남 천원군광덕면원덕리로 옮겨 정착했다. 「원터」라고도 불리는 원덕리는 그가 태어난 공주군정안면광정리와 차령고개를 사이로 이웃해 있는 마을이다. 

 차령고개는 차령산맥의 주봉인 광덕산의 등허리를 넘는 2남짓한 고개이다. 서울로 향하던 동학군이 최초로 관군에 패배해서 수많은 시체를 남겨두고 퇴각했다는 역사의 고갯길이기도 하다.

 그의 집안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어느 정도 가난을 면할 수 있었다. 부친이 원터에서 훈장을 했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마을 어린이들과 함께 아버지 밑에서 글을 배우고, 또 이들과 어울려 산과 내에서 뛰어놀았다. 어릴 때부터 그는 명석하고 총명했다. 

 「달은 비록 작으나 천하를 비추도다」(월수소조천하)

 철종 7년(1856년)정월, 부친이 달을 가리키며 시를 지어보라고 하자 5세의 김옥균은 이렇게 읊었다. 이 시작을 계기로 그가 신동이라는 소문이 마을은 물론 먼 친척에까지 퍼졌다.

 그러나 이 소문은 어린 그에게 양친과의 생이별이라는 슬픔을 안겨 주었다. 그해 가을 그의 재당숙 김병기가 서울에서 찾아와 『옥균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양부를 따라 현재 정독도서관(옛 경기고 터) 자리인 북촌(한성부 북서 대안동)으로 왔다. 서울생활이후 그의 재능은 더욱 드러났고 소문은 장안에 널리 퍼졌다.

○호연지기 키우고

 1861년 11세가 된 그는 강릉부사로 부임하는 양부를 따라 강릉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학문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산수와 장구한 역사를 지닌 고도에서 보낸 5년은 그의 몸과 교양을 더욱 살찌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율곡 이이의 외가가 있는 그곳에서 불교경전과 율곡이 지은「동호문답」 「성학집요」등 역대학자들의 학문적 유산을 빠짐없이 습득할 수 있었다. 또한 관동팔경을 찾아 호연지기를 기르기도 했다.

 22세 되던 고종 9년(1872년) 3월 문과에 장원급제한 그는 드높은 민씨 집안의 세도정치 속에 정언·지평 등의 중책을 맡았다.

 출중한 재능으로 출세가 보장된 그가 목숨을 건「피의 혁명」쪽으로 끌린 것은 10대부터 받아들인 개화사상 때문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초반에 몰두한 율곡학풍은 개혁론에 맥이 닿아 있었고, 그가 혁신정치가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됐다. 

 1866년 16세의 청년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 그는 학문 뿐 아니라 시문·글씨·그림에 탁월해 북촌의 학동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의 주위에는 재주있는 양반자제들이 모여 들었고, 그의 명성은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과 조대비에게 알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속을 터주며 깊이 사귄 사람은 아버지 뻘인 역관 오경석(1831∼1879)과 한의 유홍기(?∼?), 그리고 박영효 서광범 같은 개혁사상가들이었다.

 이들과 김옥균의 만남은 그가 20세 되던 무렵 이루어졌다. 오경석과 유홍기가 빼어난 청년지도자 김옥균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한국 최초로 형성된 이들 개혁사상가 모임의 지도자는 중인출신인 역관 오경석이었다. 오경석은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지도자 33인중 한 사람인 오세창의 아버지이다. 그는 역관으로 청나라를 왕래하며 신학문과 신문물에 눈을 떴고, 「해국도지」 「영환지략」같은 신서들을 구입해 친구인 유홍기를 깨우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젊은 정치인들에게 개혁사상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개화파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백의정승」으로 불리던 유홍기(일명 대치)는 오경석과 소장 정치인들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이들은 박영효와 서광범의 집, 혹은 유홍기의 집을 왕래하며 비밀학습과 시국토론에 몰두하면서 개혁사상을 키워갔다. 토론과 학습에 몰두한 나머지 새벽닭이 운 뒤에야 헤어지기 일쑤였다.

○묘역 1천평 규모

 이들이 꿈꾸던 근대적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개혁은 개혁파와 수구파의 일대결전이었던 「갑신개혁」을 향해 한발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원덕리를 떠나 40분 정도를 차로 달리면 그의 유일한 국내 묘가 있는 아산군 영인면아산리에 닿는다. 

 가까이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야산에 1천평 규모의 거대한 묘역이 조성돼 있다. 비문은 「고균거사 안동김공옥균지묘」와 「배정경부인 기계유씨부좌」. 

 「김옥균의 부인 유씨가 양자로 삼은 김영진씨(당시 아산군수)가 유씨의 묘를 쓰면서 그의 유품을 합장했다」는 공주군지의 설명을 읽으면 이 거대한 묘역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다. 유씨의 양자 김군수는 자신의 양부이기도 한 김옥균의 기개와 파란많은 생애를 기리기 위해 이러한 묘역을 조성한 셈이다. 아산군지에는 「이 김옥균·유씨부인의 합장묘에는 일본여인 스즈키가 간직하고 있던 선생의 상투와 담배합이 합장됐다」고도 씌어 있다.

 1914년9월11일 조성된 이 묘에는 1세기전 빛나는 꿈을 지녔던 비운의 혁명가를 기리기 위한 사람들이 간간이 찾아오곤 한다. <글 서사봉기자 사진 왕태석기자>

◎북한의 김옥균연구/봉건제 타파주장등 진보성 인정

 북한은 김옥균을 유물사관에 입각한 사회발전단계설에 따라 조선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가로 평가하고 있다.

 평양 국립역사박물관의 진열이 김옥균에서 끝나고, 또한 국립혁명박물관의 진열이 그로부터 시작될 정도로 북한은 김옥균을 한국 사회주의의 선구자로 추앙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이광린교수(중부대학장)의 논문 「북한에서의 김옥균연구」에 잘 나타나 있다. 

 북한에서의 김옥균연구는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촉구한 김일성의 교시가 1958년 하달되면서 시작됐다. 이같은 시각은 92년 4월에 발간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1권에 나타나 있다.

 『김옥균이 지도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이들의 혁신정강중 인권평등·문벌폐지·인재등용·청나라에 대한 종속관계의 단절 등은 모두 진보적인 것이다. …그가 정변준비 과정에서 일본의 도움을 받은 것이 친일의 표적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는다…』

 김일성 전집에는 김옥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목이 1쪽 분량이 넘게 펼쳐지고 있다. 이교수는 『김일성의 교시하달에 따라 북한역사학계에서는 「부르주아민족운동」에 관한 토론회가 광범위하게 개최돼 갑신정변, 김옥균, 개화사상 등에 관한 학자의 의견이 통일됐다』고 쓰고 있다.

 북한의 김옥균 연구는 김석형 이라영 김영숙 등이 발표한 11편의 논문과 연표가 실린 논문집이 발간되면서 본격화됐다.

 근대사를 전공한 김영숙은 논문 「개화파의 정강에 대해서」에서 『개화파의 14개조 정강은 봉건적인 가렴주구의 타파, 근대적인 부강발전의 도모, 인권평등과 근대적인 내각제도 수립, 민족적 자주독립의 쟁취 등을 반영했다』며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

 또 정진석 사회과학원 연구원은 논문 「김옥균의 철학과 정치경제사상」에서 김옥균 등 개화사상가를 「형이상학적 유물론자」라고 규정하면서 『봉건사회에 대한 변혁적 세계관을 발전시킨 역사적 진보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교수는 북한학자들의 논문에 대해 『이 논문들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으나 아전인수적인 해석이 많고 논증이 결여돼 픽션화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