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유물성찰 탁월/「고려청자」 「한국탑파연구」 「송도고적」등 노작 수록 우현 고유섭(1905∼1944)은 한국미술사학의 아버지 격으로 추앙되고 있다. 지금 한국미술사회는 그 분의 제자와 제자의 제자로 축을 이루고 있다. 세월이 흘러 그 분의 미학과 미술사학 자체를 연구한 논문들 뿐만 아니라 석사·박사논문까지 나왔으니 그 위상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고유섭은 1924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미학·미술사를 전공하고 졸업후 미학연구실에서 3년간 조수로 지내다 1930년 개성박물관장으로 부임하여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짧은생애에 큰업적
짧다면 아주 짧은 생애였지만 그의 조선미술사연구에 대한 열정과 학문적 역량은 후학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크기와 깊이를 갖고 있다. 그의 관심사는 건축·공예·회화·조각 전반에 걸친 조선미술사에 있었으며 필생의 과제로 삼은 것이 곧 「조선미술사」를 저술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뜻하지 않게 일찍 떠났고 그 목차만 남아 있다.
생전에 그의 저서가 출간된 것은 일본어로 쓴 「고려청자」 한 권 뿐이었다. 타계 후 제자가 되는 황수영 진홍섭 고 최순우등의 노력으로 「한국탑파연구」 「송도고적」 「전별의 병」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등이 속속 출간되었다. 양으로도 방대한 것인데 논문의 질로도 실로 한국미술사 연구의 토대가 된다. 이 여섯 권이 최근에 「고유섭전집」(전4권·통문관)으로 발간되었다.
1967년 나는 미학과에 입학하면서 당연히 고유섭 선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아름다운 전설처럼 얘기되는 그 분의 삶과 학문을 귀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의 연구내용을 강의하는 일이나 그 분이 던진 과제를 이어가는 노력을 주위에서 본 일이 없었다. 과연구실에는 그 분의 책 한 권 없었다. 모두가 서양과 동양의 미학고전만 탐구하던 시절이었다.
○저서6권 고이 간직
그러나 미술사와 고고학에서는 그 분의 연구를 이어가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분의 저서 6권을 모두 통문관 할아버지께 사서 읽고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대학원진학을 미학에서 미술사로 바꾸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미술사학계에서는 고유섭의 학문 중 미술사적 고증과 분석만을 취하고 그 분이 보여준 탁월한 미학적 성찰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 이유는 미술사학의 연구는 보다 과학적인 양식분석에 기초해야 한다는 학계의 동향 때문이었다. 미학적 성찰이란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칫 딜레탄트적 감상취미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를 말하면서 『모양이 바른 것은 정제된 힘의 안정이 있고, 모양이 삐뚜른 것은 불정한 힘의 동요가 있다. 전자는 볼륨의 아름다움, 후자는 리듬의 아름다움을 지향한다』는 식의 탁월한 미학적 성찰은 고유섭 학문의 큰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유섭의 그러한 미학적 탐구와 안목을 배우고 싶었다.
○후학들의 길잡이
고유섭은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분보다 인생을 5년 더 산 나이가 되었다. 그 분은 6권의 저서를 내었는데 나는 이제 겨우 2권을 썼다. 교통시설이 보잘 것 없던 시절에 당신은 그토록 많은 현장답사를 했건만 나는 자가용을 갖고도 그 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사물에 대한 인식과 안목에서 나는 그의 20대도 안되는 초라함을 느낀다. 그래도 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나는 오늘도 그 분의 뒤를 밟으며 살아가고 있다.<유홍준 영남대교수 미술사>유홍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