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데본자는 불의 무서움을 안다. 수령은 가슴을 조여드는 핵에 대한 국제압력에 6·25의 악몽을 되새겼을 것이다. 수령은 작년에 6·25를 승리한 「조국해방전쟁」이라 자축했다. 그건 자위며 자찬일 뿐이다. 1953년 7월27일 포화가 멎었을때 남북 양쪽은 서로 승리라 선언했지만 양쪽 모두 실제로는 자신이 졌다고 느껴야만 했다.
51년초의 원산을 되돌아보자. 지상전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미 해군 합정과 전폭비행단은 동해의 이 항구를 맹폭했다.
공간된 「미해군사」에 의하면 이해 3월29일까지 미 함정은 원산을 41일간 『밤낮없이 폭격했다…. 그것은 아마도 한 도시에 이루어진 함포공격이나 공중공격으로는 역사상 최장 시간일 것이다』고 묘사했다.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 다닐수 없다. 24시간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수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산포위공격은 「현대 미해군 역사상 최장의것」으로 8백61일간 계속됐다. 휴전 1분전에 포격은 멎었다. 『원산은 그때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멀쩡한 건물은 한채도 없었다. 공장들도 땅에 파묻혀 버렸다』고 기록되어있다.
후에 수령에 의해 「혁명의 수도」라 불리는 평양은 어떠했을까. 52년 7월12, 13일 공산측이 휴전회담에서 질척거리자 유엔군은 평양을 맹폭했다. 첫번째 공습에서 2천명의 사망자와 4천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8월29일의 공습은 전쟁기간중 평양시에 가했던 폭격중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5만명 평양시민중 6천명이 사망했다고 북측은 기록하고있다. 비행기 1천4백3대에 의해 1만ℓ의 네이팜탄, 6만2천발의 기관포탄이 저공기총사격에 사용했다. 폭탄 6백97톤이 투하됐다.
이 공습의 목적은 유엔측발표에 의하면 『군사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78개 도시및 읍 마을들의 군사목표에 민간인은 접근말라』는 경고였다는 것이다.
이 무렵 평양에 있었던 중국 인민지원군 후근부 사령관 홍학지(현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예비역 상장)는 그때를 회억하고 있다. 그는 지원군을 대표해 8·15 해방경축대회에 참석했다. 대회는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진행됐다. 이 극장은 B29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이 만든 것이었다.
경축대회와 식후 연회에서 그는 미군 전투기들이 식장위 천장에 붙어 있는듯 저공비행하며 폭탄 투하하는것을 느꼈다. 전투기는 1백여대가 넘는듯했다. 무도회장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날이 밝자 평양은 이미 공습으로 폐허의 도시로 변해있었다.
도시만이 폐허가 된게 아니다. 그속에서 삶을 영위하던 인민이, 도시를 지키려던 많은 군인들이 죽고 부상했다. 89년 문화공보부가 엮은 「6·25 남침실상」에는 전쟁의 인적 피해가 기록되어있다.
북한과 중국지원군은 1백42만명(90만명은 중국군) 이 전사했다. 한국과 유엔군은 18만2천7백75명,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37만3천명, 북한인민은 40만6천명이 죽은것으로 추정됐다.
수령은 괜히 시작한 전쟁으로 한도시의 시민 10%이상이 죽고, 한도시가 송두리째 없어지는 충격과 비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건 악몽이었다. 불의 무서움을 아는 수령이 「제2의 6·25」를 일으킨다는 것은 악몽으로의 후퇴일 뿐이다. 그러기에 핵사찰 수용은 잘한 일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